
그야말로 한 방송사의 '간판'이었다. KBS의 주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19년 동안 매일 아침을 여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활약했고, 퇴사 전까지도 KBS 간판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소통을 이어왔다. 그가 31년 만에 KBS를 떠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놀란 이유였다.
2024년 8월 KBS를 퇴사한 후 매주 목요일 아침 홈쇼핑 방송에서 활약하는 쇼호스트로, 또 그동안의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책을 내며 작가로도 활약 중인 황정민을 만났다.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며 다시 활력을 찾았다는 그는 "솔직히 준비되지 않은 퇴사라 처음엔 우울감도 느꼈다"며 "바닥을 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그동안의 시간을 전했다.
"퇴사 후 3개월, 잠만 잤어요."

황정민은 지난해 9월 출간한 '내 뜻대로 말한다는 것'을 통해 특별명예퇴직의 이유로 아이들을 꼽았다.
황정민은 1993년 KBS 19기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KBS는 본래 신입들이 입사하면 지방 순환 근무를 하지만, 황정민이 입사했을 때에만 정책적으로 새 얼굴을 새 프로그램에 배치하면서 순환 근무가 이뤄지지 않았다. KBS가 내부적으로 인력 재배치가 논의될 때마다 지방 순환 근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언급됐고 황정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황정민에게는 예비 고등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있었고, 지방 근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별명예퇴직을 신청하게 됐다.
황정민은 "퇴사 후 무력감에 빠졌다"며 "평소 안정된 삶을 선호해서 퇴사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무 준비 없이 나왔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후배들이 "사람들을 많이 만나라"고 조언했지만 전화 한 통 걸 기운조차 없었다고. 그렇게 3개월을 푹 쉬면서 "조급함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강연할 때 '눈 내릴 때 빗자루질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요. 눈이 다 내리면 쓸어야지, 내릴 때 비질을 하는 건 저만 힘든 일이니까요. 제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억지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죠."
그렇게 바닥을 찍고 나니 새로운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홈쇼핑 제안이었다. 황정민은 "30년 차 아나운서에게도 쇼호스트라는 분야는 너무나 낯설고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쉰 넘은 아줌마가 잘될 리 없다, 일이 주어졌을 때 하라"는 후배의 뼈 때리는 조언에 용기를 냈고, 지금은 '완판' 행보를 이어가는 쇼호스트로 자리매김했다.

홈쇼핑도 황정민스럽게
매주 목요일 오전 8시30분부터 2시간. 황정민이 쇼호스트로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이다. 최근엔 홈쇼핑에서 유명인들의 얼굴을 보는 게 낯설진 않지만, 그의 이름을 딴 '황정민쇼'는 다른 홈쇼핑 방송과도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음악도 직접 선곡한다"며 "보통의 홈쇼핑 방송은 템포도 빠르고 운동할 때 듣는 그런 음악이라면, 미디엄 템포의 음악과 함께 힐링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콘셉트"라고 소개했다.
"친구가 그러더군요. 능수능란하진 않은데 정말 좋은 제품을 진심으로 소개하는 것 같아 공격적이지 않아 좋다고요. 매출과 직결되는 일이라 부담은 되지만, 얼음을 녹일 뜨거운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홈쇼핑을 하는 날엔 황정민은 새벽 4시에 출근한다. 메이크업과 의상 체크, 회의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다. KBS 최장수 DJ이자 타사와 비교해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던 황정민의 성실함이 새로운 일터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이다.
30년 말하기 노하우, 아낌없이 방출하다
여기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늘렸다. 사실 황정민은 학보사 기자 출신으로 글에 대한 오랜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이미 영화, 결혼, 출산 등에 관한 책을 펴낸 바 있는 '다작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간한 '내 뜻대로 말한다는 것'은 그가 30년 동안 말을 업으로 삼으며 쌓아온 글 창고를 탈탈 털어 만든 결과물이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의 일상을 담아 실질적인 팁을 전수해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친절한 책이었다. 황정민은 "책은 1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쓰면서 너무 힘들었다"며 "앞으로 책은 쓰지 않을 거 같다"면서 웃었다.
작가로서 황정민이 강조하는 말하기의 핵심은 '기술'이 아닌 '태도'다. 그는 말을 내뱉기 전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첫 번째 문은 '그 말이 사실인가', 두 번째 문은 '그 말이 필요한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은 '그 말이 따뜻한가'이다.
"저는 진실이라도 거칠게 말하면 상처가 된다고 생각해요. 서로 한 배를 타고 가는 동료라고 생각한다면, 말을 건네는 타이밍이나 부드러운 말투가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그는 영화 '원더'에 나오는 "친절해야 한다. 네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니까"라는 대사를 가슴에 품고 산다고 했다. 이번 책 역시 오늘을 견디며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누군가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획했다는 설명이다.

다시 꿈꾸는 시간들…"저의 버킷리스트는요"
퇴사 후 황정민은 가족들과 더욱 가까워졌다고 했다. 오전 홈쇼핑을 마치고 집에서 아이들의 점심을 챙겨주고 인터뷰에 왔다는 그는 "아이들이 엄마가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이 매진됐다고 하면 좋아하고, 책이 나왔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해준다"며 "그런데 아이들도 그렇고 주변에 자세히 물어보진 않는다. 책을 읽었다고 하면 발가벗겨진 거 같고 안 읽었다고 하면 서운할 거 같아서"라며 솔직한 입담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다음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올해 새롭게 시작할 버킷리스트로 피아노와 강연, 그리고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소통을 꼽았다.
황정민은 "직장 일로 바쁠 땐 엄두도 못 냈던 일"이라며 "딸이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을 보며 저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더불어 오프라인으로는 강연, 온라인으로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을 통해 지속적인 소통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 30년 동안 TV와 라디오로 소통해왔다면 다른 방식으로 소통을 계획하고 있는 것. 특히 강연에 대해서는 "책을 쓴 후 강연 제안을 받고 하나씩 하고 있는데 직접 마주하면서 얻는 에너지들이 있다"며 "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받는 기운이 이런 걸까 싶더라"고 전했다.
더불어 청취자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오랜 기간 소통했던 경험을 살려보고 싶다는 계획이다.
"제가 라디오를 할 때 오프닝에 애착이 컸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무리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즐겁게 해나가고 싶어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