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긴 우리 영역이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매일 아침 남자의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적힌 협박 편지가 놓였습니다. 문밖에는 늘 낯선 사내들이 서성였습니다. 비슷한 경고를 받은 다른 이는 새벽 골목길에서 괴한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남자는 공포에 질려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일 거야.”
얼마 후 남자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그 불길한 예언은 현실이 됐습니다. “과로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지병이 악화된 것 같습니다.” 시신을 본 의사는 이렇게 말했지만, 남자의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부짖었습니다. “남편은 독살당했어요.” 하지만 이곳, 나폴리에서 그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같은 시각, 도시 다른 편에 있는 어두침침한 작업실 안. 주세페 데 리베라(1591~1652)는 조용히 붓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캔버스에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노인의 고통이 생생히 떠오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붓끝에서 붉은 물감이 튀어 올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주세페는 잠시 손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마치 핏물이 튄 것 같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게 쉽진 않지.’
당대 유럽 최대 항구도시를 주름잡던 최고의 그림 거장이자, 나폴리 ‘그림 마피아’의 수장이었던 주세페. 그의 잔혹한 그림과 삶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빚쟁이 그놈, 나폴리에 오다
미술은 아름다운 것. 그러니 화가와 갤러리스트들도 한없이 고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거액의 돈이 오가고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충돌하는 미술계에서는, 때때로 일상보다 더한 아수라장이 펼쳐지곤 합니다. 학맥이나 파벌에 따라 뭉쳐 서로를 띄워주고 다른 이들을 비방하는 일은 오늘날 전 세계 미술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이런 일은 과거에 더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화가들은 보통 ‘길드’라는 이익 집단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안에서의 권력 투쟁도 치열했지만, 외부 화가에 대한 텃세는 상상을 초월했지요. 말싸움에서 시작한 밥그릇 다툼은 종종 협박이나 폭행으로 번졌고, 심지어 살인까지 이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17세기 나폴리 미술계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당시 나폴리는 오늘날로 치면 ‘지중해의 뉴욕’. 스페인 제국의 통치를 받던 이곳은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였고, 전 세계의 물건과 사람이 모여드는 북적이는 항구였습니다. 돈과 권력, 욕망이 바닷바람과 한데 뒤섞여 들끓는 기회의 땅이었죠. 하지만 이런 화려한 겉모습 뒤, 뒷골목 안쪽에서는 매일같이 칼부림이 벌어지는 무법천지가 펼쳐졌습니다.
한편 화가들에게 나폴리는 거대한 노다지였습니다. 그렇잖아도 나폴리는 돈이 몰리는 곳. 게다가 당시 나폴리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부는 스페인 본토에서 가져온 막대한 돈으로 사치품과 그림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이 시장을 노리는 외지 화가들도 나폴리에 이끌렸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마피아를 방불케 하는 현지 화가들의 살벌한 텃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주세페가 있었습니다.


주세페의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은 희미합니다. 1591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로 이주해 청년 시절을 로마에서 보냈습니다. 당대 최고 화가이자 문제아였던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지만, 로마 시절만 해도 주세페는 ‘안 팔리는 화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페는 돈을 흥청망청 쓰며 방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로마를 떠난 이유도 이런 생활 때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나폴리로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도착한 나폴리는 주세페에게 운명적인 장소였습니다. 그는 나폴리 지배층과 같은 스페인 혈통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극적이고 적나라한 화풍은 거친 나폴리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았습니다. 유일한 걸림돌은 외지인에 대한 극심한 텃세뿐이었습니다.
로마의 밑바닥에서 거친 삶을 살아온 주세페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나폴리 예술계의 거물이었던 조반니 베라르디노 아졸리노의 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결혼하는 데 성공합니다. 덕분에 주세페는 유력 화가의 사위로서 빠르게 나폴리 미술계의 중심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이렇듯 생존과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총독들의 화가
화가 주세페의 가장 큰 특징도 철저히 현실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이나 신화 속 사건과 인물을 잔혹할 만큼 현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미술사학자 키스 크리스티안센(전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유럽 회화 부문 명예 관장)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세페의 그림 속 순교하는 성인들을 고문하는 이들은 마치 동네 정육점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끔찍한 고문을 수행한다.” 그 말대로 주세페의 그림 속 가해자들은 그저 윗사람들이 시킨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회사원처럼 보입니다. 다만 이들이 맡은 일이 사람의 살을 찢고 근육을 뒤트는 것일 뿐입니다.
반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과 성인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폴리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뜨거운 태양 빛을 받아 피부가 그을리고 주름이 깊게 패인 노동자의 얼굴 말입니다. 그래서 그림 속 성인의 얼굴에는 고귀한 성스러움 대신 세월의 풍파와 가난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주세페가 이런 그림을 그린 데에는 로마 시절 길바닥에서 생활한 경험이 녹아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추기경과 귀족부터 부랑자까지 많은 사람을 보고 겪으며 그는 인간의 본질이 결국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밥을 먹고 배설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볼품없는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주세페에게 이는 추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추함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라고 믿었습니다. 반대로 대상을 억지로 아름답고 성스럽게 그리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습니다.


나폴리 사람들은 주세페의 작품에 담긴 이런 진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긴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위대한 성인이 되어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은 훨씬 감동적으로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나폴리를 다스리던 권력자들도 주세페의 팬이 되었습니다. 1616년부터 1620년까지 나폴리 총독이었던 오수나 공작은 그를 궁정 화가로 임명해 월급을 줬고, 이후 재임한 몬테레이 백작도 그의 작품을 스페인 왕실에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덕분에 주세페는 나폴리 왕궁에 살 수 있는 허가를 얻었고, ‘총독의 가족’이라는 호칭까지 얻었습니다.
1626년 그는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 훈장을 받으며 명예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혈통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방인이 귀족에 준하는 자리에 오른 대성공이었습니다. 주세페는 이 훈장을 크게 자랑스러워했고, 이후 자신의 작품에 서명할 때 이름 옆에 ‘그리스도 기사단’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써서 자신의 신분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세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등급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호적 조작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욕심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공격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나폴리 화(畵)피아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은 40대의 나이, 나폴리 최고의 화가로 불렸던 주세페는 새로운 도전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다른 도시의 화가들이 나폴리 미술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지도 모를 놈들이 우리 나폴리 화가들을 위협하다니!” 주세페와 동료 화가들은 똘똘 뭉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조직적인 방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지역 출신의 화가들을 비방하는 건 기본. 범죄 누명을 씌워 신고하거나, 화가의 조수를 밤길에 습격해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당했던 화가 중 하나가 볼로냐에서 왔던 귀도 레니였습니다. 그는 나폴리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나폴리 미술계는 강도 소굴이야!”그러던 중 정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로마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아름답고 고상한 화풍의 고전주의 화가들이 나폴리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로마 화파의 거장 도메니키노가 있었습니다. 주세페는 도메니키노가 정말 싫었습니다. 단순히 밥그릇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도메니키노는 주세페가 추구하는 예술적 신념의 대척점에 있는 ‘적’. 주세페는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도메니키노는 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을 보고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나폴리 대성당의 대형 프로젝트인 ‘산 젠나로 보물 예배당’ 장식 의뢰를 둘러싸고 폭발했습니다. 나폴리 화가가 아닌 외지인 도메니키노가 이 큰 프로젝트를 따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세페와 동료 화가들은 도메니키노에게 온갖 위협을 가했습니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도메니키노는 매일 아침 작업실 문 앞에 놓인 살해 협박 편지를 읽어야 했고, 누군가 몰래 그림을 긁어놓거나 물감에 모래를 섞는 행위도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해 주세페는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도메니키노의 작품을 평가하는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라이벌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기회를 잡은 주세페는 위원회에서 도메니키노의 그림을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깎아내렸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도메니키노는 어느 날 집에서 쓰러져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사망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주세페가 그를 독살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도메니키노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그가 죽자마자 주세페와 그의 동료 화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주세페는 그 자리에 나폴리의 수호성인인 성 젠나로가 기독교 박해 시절, 펄펄 끓는 용광로에 던져졌음에도 상처 하나 없이 걸어 나왔다는 기적을 다룬 ‘불가마에서 무사히 나오는 성 젠나로’를 그려 넣었습니다. 불같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경쟁자와 달리, 본인은 승리했다는 사실을 과시하듯이 말이지요. 이는 도메니키노 등 로마 화가들이 추구하던 부드러운 고전주의 대신 주세페 특유의 거칠고 사실적인 나폴리식 화풍이 성당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몰락
주세페는 나폴리 미술계의 명실상부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 운명의 사건은 1647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서자(돈 후안 호세)가 나폴리를 방문하면서 일어났습니다. 호세가 주세페가 애지중지하던 조카 마리아 로사를 납치해 버린 겁니다. 스페인의 권력에 기대 왕과 같이 군림하던 그도, 스페인 왕족이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짓밟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주세페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권력과 평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총독의 화가라고 기세등등하더니, 결국 본국 왕족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네.”

여기에 건강 악화까지 겹쳤습니다. 1640년대 후반, 50대에 접어든 그는 여러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과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을 겁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힘겨워진 그는 경제적 곤궁에 빠졌습니다. 1651년, 주세페가 어느 수도원장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는 그의 처절한 상황을 증명합니다. “몸이 안 좋습니다.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궁핍합니다. 제발 작품 잔금을 치러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나폴리를 호령하던 ‘그림 마피아’의 수장이던 거물이 생계를 걱정하며 읍소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말년을 어렵게 보내던 주세페는 1652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방인으로 시작해 나폴리 미술계의 정점에 올랐지만, 결국 허무하게 몰락해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씁쓸한 최후였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호한 배경,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룬 성공, 경쟁자에 대한 잔혹한 견제, 영광과 몰락, 쓸쓸한 최후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마치 악당이 주인공인 피카레스크 소설, 혹은 누아르 영화를 연상시킵니다. 잔혹하고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한 그의 그림들도 이런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전기 작가 베르나르도 데 도미니치는 주세페의 삶을 아예 하나의 범죄 소설처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라이벌의 작업실에 불을 질렀다거나,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길거리를 떠돌다 객사했다는 식의 과장된 이야기들이 전기 곳곳에 담겨 있었지요.

하지만 주세페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기만 했을까요.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는 사실 꽤 책임감 강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속에는 가족 부양을 걱정하며 돈을 받지 못해 쩔쩔매는 평범한 직업인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아내의 언니가 과부가 되자 그녀의 다섯 자녀를 자기 집에 거두어 키웠을 정도로 정 많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면모도 있었습니다. 그가 독살을 비롯한 강력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외지 화가를 견제했던 그 독한 모습도 당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치열한 생존 현장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주세페의 삶은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는 잔인한 악당이 될 수도 있고,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낸 가장이자 직업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예술은 당대의 위선적인 이상주의에 대한 강렬한 반박이었습니다. 성인을 거리의 부랑자처럼, 신화 속 신들을 주정뱅이처럼 묘사한 그의 그림에는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현실성과 존엄이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진실이 품은 양면성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주세페의 작품이 담고 있는 진짜 ‘회화의 힘’입니다. 그가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i>**이번 기사는 Alfonso E. Perez Sanchez와 Nicola Spinosa의 'Jusepe de Ribera: 1591~1652'(메트로폴리탄박물관 출판)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i>**다음 주 중동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어 2주간 연재를 쉽니다. 최근 개관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집트 대박물관(GEM), 루브르박물관의 아부다비 분관 등 생생한 현장을 담은 취재 기사로 만나 뵙겠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