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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닮은 이유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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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닮은 이유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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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7년 크냐즈(옛 러시아의 제후, 公) 야콥 돌고루키가 외교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왔다. 훗날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어린 차르의 이복누이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섭정 통치하던 러시아로 그가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천체관측의가 있었다. 천체관측의는 나이 어린 표트르가 원하던 물건.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는 꼬마는 크게 낙담했다. 마침내 그는 이 기계를 다룰 줄 아는 프란츠 티메르만이라는 이름의 젊은 네덜란드인을 찾았다.

    어린 표트르의 과학 교사이던 이 네덜란드인은 기초 수학부터 지리, 포격술, 요새 건설 등을 가르쳤다. 표트르의 지식 습득 수준은 들쑥날쑥했지만, 그는 ‘실질적인 모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헛간에서 삼촌 니키타 로마노프 소유였던, 반쯤 썩은 영국식 보트를 티메르만과 함께 발견한 표트르는 네덜란드 목수 카르스텐 브란트의 지도 아래 이를 복원했다. 복원한 배로 야우자강을 운항했고, 결국 보다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는 플레셰에보 호수로 보트를 옮겼다. 그리고 이 장난감 배는 ‘러시아 함대의 조상’이 됐다.


    보트에서 표트르는 브란트와 함께 항해학을 공부했다. 브란트의 지도 아래서 표트르는 2척의 작은 프리깃함과 3척의 작은 요트를 만들었다. 꼬마 시절부터 그는 국가를 위한 거대한 대양함대를 꿈꿨다. 그의 조국은 단지 백해의 얼음과 안개 탓에 존재를 잊어버린 항구 아르한겔스크라는 단 한 개의 항구만 보유했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고 권력을 손에 쥔 표트르는 함대를 만드는 꿈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목수 브란트와 그의 20명의 동료가 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플레셰에보 호숫가에 자리 잡았다. 조선소 주변에 시급하게 장인 거주지가 조성됐다. 이곳에 때때로 차르가 남몰래 왔다. 단순 노동자처럼 치장하고선 도끼와 망치, 대패를 능숙하게 다뤘다. 그는 출신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실제 항해에도 표트르는 앞장섰다. 1693년 7월 차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 아르한겔스크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네덜란드 선원의 복장을 하고 ‘신성한 표트르’라는 이름의 요트 뱃머리에 서서 열린 바다로 나아갔다. 항해 중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백해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는 난파될 뻔했지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단단한 땅을 밟자마자, 표트르는 친히 1.5사젠(옛 러시아의 길이 단위) 높이의 목제 십자가를 만들어 거기에 그가 항해 언어를 잘 아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네덜란드어로 기록을 남겼다. “1694년 여름, 선장 표트르가 이 십자가를 만들었다.”


    아르한겔스크로 돌아와서 그는 전투 함대를 건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군함은 러시아의 장인들이 건조해야 했다. 1694년 프리깃함 ‘스뱌토예 프로로체스트바’(성스러운 예언자)호가 출항하자 당시 22세이던 표트르는 열두 살 아이처럼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른 배들을 암스테르담 시장이던 니콜라스 비트센에게 주문했다. 그것은 44문의 대포를 갖춘 프리깃함이었다.



    본격적으로 함대가 모습을 갖춘 것은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이 계기가 됐다. 육지로는 접근하기 힘든 아조프 요새를 점령하려면 바다에서 요새를 공격해야 했다. 플레셰에보 호수의 배들은 오락용으로나 적합했다.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함대였다. 차르 일가가 직접 9척의 배를 준비했다. 선장과 항해사, 선원 그리고 배를 만드는 전문가가 해외에서 초빙됐다.

    거대한 건설을 위해 선택된 장소는 돈강 연안의 보로네시였다. 대장장이, 목수, 목공들이 급히 보로네시로 보내졌다. 3만 명의 농민이 이곳에서 강제 노동에 몰렸다. 울창한 보로네시 숲에서 6000그루의 나무가 공급됐다. 전 러시아에서 철, 구리, 타르, 밧줄, 리넨, 못, 대마 등 배의 장비로 꼭 필요한 것을 모았다.


    표트르는 미래의 함대 지휘자도 임명했다. 스위스인 프란츠 레포르트를 제독에, 베네치아인 조르조 리마를 부제독에, 프랑스인 발타사르 드 로제르를 해군 소장으로 임명했다. 항해할 수 없는 기간에 표트르는 보로네시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작업을 했다. 노동자들과 섞여 그는 도끼와 대패, 추, 해머, 컴퍼스를 관리했다. 그는 ‘프린키피움’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우아하고 재빠른 갤리선을 200명의 노동자와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함대는 아조프 요새 함락에 큰 역할을 했다.

    해외에서 첨단 조선 기술을 배우는 데도 표트르가 앞장섰다. 169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때 표트르는 배를 빌려 작은 항구인 잔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차르는 지방 뱃사공의 옷을 사 입고는 조선에 쓰이는 도끼와 대패를 다뤘다. 게다가 거리를 산책하고, 제재소와 밧줄 공장, 유채 제분소를 찾아가고, 정밀한 측량 도구를 만드는 장인을 찾아가는 체험의 시간도 가졌다. 도처에서 묻고 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그만 배를 사는 거래를 맺었고, 그것을 스스로 수선하고, 마스트와 돛을 붙인 뒤 잔강을 운항하며 즐겼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거대한 동인도 조선소를 찾아가 피테르 티메르만이라는 이름의 목수 밑에서 여러 차례 일했다. 해가 뜰 때 일터로 출발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차르는 대패와 압지틀로 일했다.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표트르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바닷길을 열기 위해 배를 수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지 목공으로부터 ‘수료증’도 받았다. 자신이 작업에 참여한 ‘암스테르담 호’를 진수했을 때는 러시아의 튀르크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술잔을 손에 들고 암스테르담 시장을 껴안았다.

    네덜란드에 대한 차르의 애착은 매우 강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러시아 국기에 남아 있다. 빨간색, 흰색, 그리고 푸른색의 수평 줄무늬로 이뤄진 네덜란드 국기가 색깔 순서만 바꾼 채 러시아 깃발이 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 바다, 신기술에 대한 차르의 관심은 러시아를 변방 내륙 국가에서 유럽으로 팽창하는 국가로 성격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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