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선 협주곡이나 교향곡의 인기에 실내악이 묻힌 감이 있지만, 유럽에선 그 대접이 다르다.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피에르 불레즈가 ‘교향곡을 거대한 실내악처럼’이란 기조를 내걸었을 정도로 실내악은 유럽 악단의 근간이었다. 실내악에선 서로 다른 악기들이 대화하듯 곡을 풀어나가야 한다. 이 흐름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연주는 어색해지기 십상. 반면 연주자가 호흡을 함께 나눌 정도로 악기의 대화가 긴밀해지면 다른 장르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내밀한 음악이 탄생한다. 실내악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은밀한 조화다.
아벨 콰르텟은 2013년 독일 유학 중이던 한국인이 만든 실내악단이다. 2014년 아우구스트 에버딩 국제 실내악 콩쿠르 2위, 2015년 요제프 하이든 콩쿠르 1위, 2017년 제네바 콩쿠르 3위 등에 오르며 실내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인정받았다. 팀원이 몇 번 바뀌었지만 리더인 바이올리니스트 윤은솔과 첼리스트 조형준은 악단의 시작부터 동고동락한 사이. 2016년 조형준의 부인인 바이올리니스트 박수현, 2023년 비올리스트 박하문이 합류했다. 제1바이올린은 따로 정해두지 않고 곡에 따라 바꾼다.
교향곡을 닮아가는 현악사중주
아벨 콰르텟은 지난해 7월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을 시작으로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9월과 11월에도 공연한 뒤 올 2월 5·7일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카페 베토벤’에서 만난 아벨 콰르텟의 리더 윤은솔은 “2023년 낸 첫 정규 앨범의 녹음을 하이든으로 정했지만 원래는 베토벤으로 하려 했다”며 “다만 그 여정이 길어질까 봐 주저했는데, 단원 한 명이 베토벤을 제안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음 프로젝트가 흘러갔다”고 말했다.
베토벤을 제대로 알려면 현악사중주를 알아야 한다. 그가 남긴 현악사중주 작품은 대푸가를 따로 더해 17개. 이 중 12~16번과 ‘대푸가’를 포함한 후기 6개 작품은 그가 교향곡 ‘합창’을 선보인 이후 나왔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이 내면의 소리에 의존해 쓴 곡들이다. 조형준은 “베토벤 후기 음악은 당대 사람들에게도 어려웠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다”며 “그냥 들으면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베토벤 후기 작품은 분량도 만만치 않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컸던 베토벤의 초기 현악사중주는 작품별 길이가 25분 남짓이다. 조그마한 살롱에서 연주하는 데 초점을 둔 인상이 강하다. 중기 작품은 35분가량으로 분량이 늘면서 ‘교향곡스러움’이 생겼다. 후기에선 길이가 40분을 넘겼다. 아벨 콰르텟 단원들도 지난 11월 공연에서 연주한 첫 현악사중주 후기 작품인 12번을 지금까지 연주한 베토벤 현악사중주 중 최대 난곡으로 꼽았다. “곡의 부피가 커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을 뿐 아니라 연습량과 공부량 모두 많았다”고.
전설이 된 베토벤의 ‘마이 웨이’
아벨 콰르텟은 2월 공연에서 나머지 후기 작품 전부를 연주한다. 힘든 여정이겠지만 악단이나 관객이나 베토벤의 진가를 체감할 기회다. 조형준은 “후기의 베토벤은 누가 뭐래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갔다”며 “청각 상실로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자연스럽게 차단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성찰하며 내면을 단단히 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대 음악가들이 현악사중주 연주를 어려워하면 베토벤은 ‘너희가 연주하지 않더라도 후대 사람들이 알아봐 줄 거다’라면서 자신의 작품을 밀어붙였다고 해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자신감이겠죠.”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중엔 ‘대푸가’도 있다. 본래 13번의 마지막 악장으로 쓰였다가 별도로 출판한 곡으로, 음악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가 “시대를 초월한 음악으로 언제나 현대적이며 영원히 현대적일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 바렌보임은 연주자에게 지적·육체적·정신적 한계를 동시에 요구하는 곡으로 봤다. 아벨 콰르텟은 13번을 마치고 바로 이어서 ‘대푸가’를 연주하기로 했다. “보통 13번의 마지막 악장을 ‘대푸가’로 바꾸거나 그대로 두어 둘 중 하나만 연주하는데 둘 모두를 살리기로 했다”는 게 윤은솔의 설명이다.

베토벤이 ‘병이 나은 자가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인 15번 3악장은 거룩함이 가득하다. 같은 작품의 5악장은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으로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토벤 인생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사중주 16번은 분량이 27분에 불과하다. 초기작과 비슷한 길이다. 후기 작품의 묵직함과 조금 다른 천진난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조형준의 해석이 흥미롭다. “마지막에 베토벤은 심오하게만 생각한 게 아니라 ‘유머’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아요. 음악에서도 현지의 유머를 이해하고 이를 생활이나 음악에서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연습량으론 세계 최고일 텐데, 이런 유머 감각도 겸비했으면 합니다.”
음악에 쌓인 14년의 나이테
아벨 콰르텟은 자신들의 베토벤을 ‘이 시절의 베토벤’으로 정의했다. 그들에게 쌓인 세월의 무게를 표현하는 말이다. 악단 단원 중 3명에겐 어느새 자녀가 생겼다. 유럽에서 공부하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단원 간 나이 차가 많게는 열한 살이나 나서 세대차도 존재한다. 박수현은 “각자 겪은 시절과 서로가 악단과 함께한 순간이 서로 다르다”며 “10대 시절의 인연과 지금의 인연이 다르듯 서로 다른 시절에 바라보는 베토벤을 저마다의 연주에 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악단을 시작하고 4년간은 콩쿠르라는 목표가 뚜렷했다. 유럽 무대에서 성과를 거둔 뒤엔 단원들이 각자의 삶에 집중하다 보니 콰르텟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실내악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지켜오고 있다. 박하문은 “콰르텟을 한다는 건 실내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각자 쉬는 방식은 다르다. 박하문은 차를 몰고 드라이브하는 걸 즐긴다. 최근 춘천에 가서 먹은 닭갈비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윤은솔은 두 자녀를 돌보며 일상의 행복을 쌓아나간다. 박수현도 “육아가 취미”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를 좋아한다. 양자역학 같은 과학 지식을 쌓는 데도 관심이 많아 남편인 조형준에게 자신이 새로 접한 내용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조형준은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추신수 입단 전부터 좋아했다고. 그는 이탈리아 축구팀 파르마의 팬이기도 하다. 아내와 유니폼을 맞춰 입고 스포츠 경기를 볼 때도 있다.
홀로 20대 미혼인 박하문은 단원들과 세대차를 느끼지 않을까. 그는 웃으며 “가끔 단원분들이 S.E.S.의 노래로 비유하거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대해 말할 때가 있다”고 웃었다. “이런 얘기들을 계속 듣다 보니 이젠 친구들을 볼 때보다 단원분들이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형, 누나들은 먼저 공부를 끝내고 여기에 와 있잖아요. 그만큼 제가 아벨 콰르텟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