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인권운동가 맬컴X의 자서전 <맬컴X>(1965)의 집필자 알렉스 헤일리는 1976년 장편소설 <뿌리>를 출간한다. 1767년 감비아에서 납치돼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 쿤타킨테와 그 가계(家系)의 고난을 그린 대작으로서 작가의 외가 쪽 이야기가 바탕이다.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영국 식민지이던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건 1619년 버지니아 해변이었다. 그로부터 250년 가까이가 흐른 1865년 12월 18일이 돼서야 수정헌법 제13조의 비준 완료가 선포돼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 폐지가 효력을 발휘했다.노예제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최악의 악’일진대, 이 죄악을 둘러싼 의외의 사실들을 숙고해보는 것은 인간의 어두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일과 같다. 일단, 흑인 노예제에 관해 우리는 백인들만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간 사냥’을 벌인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의 민낯은 복잡하다.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들과 부족들은 전쟁과 약탈로 포획한 다른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고, 그들을 해안으로 끌고 가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흑인 중간노예상들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핵심 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라는 국가 노예계급에 생산을 전담시켰고, 로마 제국은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노예들의 노동력 위에 세워졌다. 이슬람 제국 또한 8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동아프리카에서 수천만 명의 흑인을 잡아온 ‘사하라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몽골 제국, 중국 왕조들은 물론 노예제도는 인종, 문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류사에 존재했다. 조선은 동족을 가장 악독하게 노예로 부린 국가였다.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하에 부모 중 하나만 노비여도 자식을 노비로 만들었다.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으며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다. 영국에서는 1833년, 프랑스에서는 1848년에야 노예제가 사라졌다.
이런 인간 본성의 추악함은 사라졌다고 사라진 게 아니다. 미국 해방 흑인노예들 중 일부가 아프리카로 돌아가 1847년에 건국한 라이베리아(‘Liberia’는 라틴어로 ‘자유’를 뜻하는 ‘Liber’에서 유래했다. 즉 ‘자유의 나라’라는 뜻)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인구의 5%에 불과한 아메리코-라이베리안(미국계 흑인과 그 후손)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적 압제와 사실상의 노예제를 복제했다. 원주민 흑인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선거권, 재산권(토지) 등의 기본권을 박탈했다. 마치 미국 남부의 백인 주인님 행세를 했다. 1980년까지 약 130여 년간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했고, 이는 라이베리아 내전(1989~2003)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이 사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서늘한 진실을 증명한다. 노예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도덕성이 갑자기 각성돼서가 아니었다. 근대 서구문명이 무르익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확산되면서부터다. 개인을 법 앞의 주체로 인정하는 소유권과 계약의 제도화,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사상,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적 철학, 강제 노동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노동이 경제적으로 훨씬 효율적이라는 애덤 스미스적 깨달음 등이 결합돼 인류는 비로소 수천 년간 지속된 노예제를 타파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이기적이다. 하여 권력은 분산돼야 하고, 시장은 열려 있어야 하며, 제도는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충돌을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소련의 굴라크(Gulag)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인간을 개조하겠다는 오만의 소치였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에서 경고했듯이, 사회주의적 설계와 통제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할지라도 대중을 재난과 예속의 길로 몰아간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사악함을 상수로 둔다. 그러지 않으니 위선에 빠지고 위선자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위선자들은 정의의 대변자, 역사의 선봉이라 자부하는 특권층이 되고 대중은 스스로 노예가 된다. 인간이 최악인 것은, 노예를 만드는 것만큼 노예가 되는 것도 좋아한다는 점에 있다. 눈을 감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노예인지, 노예의 주인인지. 둘 다 아닌 사람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