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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기의 그림자, ‘속성 기반 규제’는 아직도 유효한가
규제란 무엇인가. 질서를 확립해 시장과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여러 ‘속성 기반 규제’들은 과연 이 목적을 달성해 왔을까.동성동본 간 혼인 금지, 일본 대중문화 수입 차단, 그리고 오늘날의 가상자산 거래소 규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오랜 기간 개인이나 기업의 행위나 능력이 아니라, 본질적 속성을 이유로 특정 권리를 제한해 왔다. 혈족 관계, 국적, 기업 규모, 산업 성격 등이 규제의 기준이 된다.
속성 기반 규제란 개인이나 기업이 선택할 수 없는 특성을 이유로 차별적 취급을 하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규제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주로 등장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미국의 짐 크로우 법, 나치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 대표적 사례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이미 이러한 규제 대부분을 폐기했다. 그러나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나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지금도 속성 기반 규제를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역사 속의 실패 사례들
동성동본 간 혼인 금지는 1960년 도입된 뒤 1997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2005년 법률 폐지까지 45년간 유지됐다. 명분은 유전적 결손 방지였지만, 실제로는 신분제의 잔재이자 유교적 가부장 질서의 산물에 가까웠다. 중국은 1931년에, 북한은 1948년에 이미 폐지한 제도를 한국만 고수했다.결과는 역설적이었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하면 그만이었고, 해외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문제는 사라졌다. 법적으로는 금지됐지만, 현실의 관계는 음성적으로 존속했다. 규제는 질서를 만들지 못했고, 제도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일본 대중문화 금지도 마찬가지다. 1945년부터 1998년까지 53년간 이어진 이 규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장기 차단 정책이었다. 일본 만화와 음반은 불법 복제돼 암시장에서 유통됐고, 부산 일대에서는 가정에서 NHK 시청이 가능했다. 이 규제로 얻은 것이 민족 정서의 보호였는지, 문화 산업의 성장 기반이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가상자산 규제, 악순환의 반복
오늘날 가상자산 시장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2021년 3월 특정금융정보법 시행 이후 한국에서는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법인만을 선택적으로 배제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한국이 유일하다. 국내 거래소에서는 선물·마진 등 파생상품 거래도 허용되지 않는다.그 결과는 명확하다. 기관급 유동성과 다양한 거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자금이 해외 거래소로 이동하며, 수백억 달러 규모의 자본이탈이 발생했다. 상위 10% 개인 투자자가 전체 거래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됐다. 기관투자자가 부재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소수의 대규모 개인 투자자 움직임에 시장 전체가 흔들리고, 해외와의 대규모 재정거래(아비트라지)가 불가능해 ‘김치 프리미엄’도 상시화됐다. 시장 안정을 목표로 한 규제가 오히려 시장 변동성을 키운 셈이다.
규제의 확장, 산업의 위축
최근에는 가상자산 거래소 대주주의 지분을 15%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특금법 시행 이후 수십 개 거래소가 퇴출되고 5개 주요 거래소만 생존한 상황에서, 남은 사업자들마저 추가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명분은 금산분리다. 그러나 한국식 금산분리 원칙과 대기업 규제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미국은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으로 금산분리를 도입했지만 1999년 이를 폐지했다. EU는 사실상 금산분리 규제를 두지 않고 있으며, 일본도 2021년 은행의 비금융업 진출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강한 금산분리 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나아가 자산 5조 원 이상 기업집단에 대해 출자총액 제한, 부채비율 규제, 상호출자 금지 등 다층적·누적 규제를 적용한다.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이러한 다단계 규제를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이 사실상 유일하다.
고도성장기에는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2026년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 규제가 여전히 순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무엇을 위한 규제인가
동성동본 금혼은 결국 폐지됐고, 일본 문화 금지도 단계적으로 개방됐다. 이들 규제는 시간이 흐르며 정당성을 상실했고, 사회적 합의 속에서 사라졌다. 가상자산 규제도 같은 경로를 밟게 될까.비트코인은 이미 글로벌 기관투자자의 포트폴리오 자산이 됐고, 스테이블코인은 국제 송금의 새로운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흐름을 국경 단위의 규제로 차단하기는 어렵다.
기업은 생명체와 같다. 기술, 자본시장, 투자자 심리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한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규제는 시장을 왜곡하거나 산업 자체를 고사시킨다. 법률에 명시되지 않은 금산분리 원칙을 관행적으로 가상자산 산업에 적용하는 것은, 한국 사업자의 경쟁력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고 이용자들을 해외 시장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규제에는 명확한 목표가 필요하다. 투기 억제인지, 시장 안정인지, 금융 안전인지가 분명해야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규제는 목표도, 수단도 모호하다. 과거의 규제 방식을 관성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제는 고도성장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코빗 리서치센터 설립 멤버이자 연구위원이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건과 개념을 쉽게 풀어 알리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 블록체인 프로젝트 전략 기획,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구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소개한 외부 필진 칼럼이며 한국경제신문의 입장이 아닙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