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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통신·에너지 등 핵심 인프라 부문에서 중국산 장비 퇴출을 강도 높게 추진하면서 중국과 무역 갈등이 재점화할 조짐이다.
EU는 주요 인프라의 취약성을 보완해 경제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지만 중국 기업을 직접적으로 겨낭하고 있는만큼 중국 정부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핵심 인프라에서 3년 안에 완전 철거 강제
20일(현지시간) 로이터·AP통신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중국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ZTE 등의 제품을 핵심 인프라에서 3년 안에 완전히 철거하는 것을 강제한 사이버 보안법 개정안을 공개했다.고위험 공급 업체가 제공하는 장비의 단계적 퇴출을 담은 이 법안은 5세대(5G) 이동통신망뿐 아니라 물 공급 시스템, 보건 의료 기기, 국경 검문소 보안 스캐너 등 18개 핵심 인프라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헤나 비르쿠넨 EU 기술주권·안보·민주주의 담당 집행위원은 "우리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정보통신기술 공급망을 확보해 시민과 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EU는 2020년 '5G 네트워크 툴박스' 지침을 마련해 보안 위험이 있는 업체를 통신 인프라에서 배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이 없어 국가마다 적용이 달랐다. 독일과 영국은 자체 규제로 화웨이 장비 비중을 줄여왔지만, 헝가리·이탈리아 등은 저렴한 가격을 이유로 중국산 장비를 계속 써왔다.
예컨대 EU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의 90% 이상에 중국산으로 알려졌다.
"대안 없다" 지적도 나와…경제 안보 주권 경쟁
이번 새로운 법안이 유럽의회를 통과하면 모든 회원국은 3년 안에 고위험 공급업체 장비를 제거해야만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재정 제재를 받는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미국 공급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동시에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이번 조치가 소비자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에 따르면 중국산 장비를 모두 배제할 경우 유럽의 5G 구축 비용은 약 550억유로(약 94조9500억 원) 증가한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는 화웨이 장비 전면 교체에 드는 비용을 통신사에 보조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조치로 유럽 통신장비 시장이 급격하게 재편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실제 지난해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화웨이와 ZTE의 합산 점유율은 42%에 달한다. 노키아, 에릭슨, 시스코, 삼성전자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중국은 즉각 반발하고 있다. 이 조치가 공개된 뒤 화웨이 측은 성명을 통해 "유럽에서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업체로 정당한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며 "객관적인 기술 표준이나 증거가 아닌 출신국을 기준으로 공급업체를 배제하는 건 EU의 기본법 원칙인 공정성과 비차별 원칙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앞서 중국 정부도 "법적 근거와 사실 증거 없이 행정 수단으로 제한을 강제하고 업체의 시장 참여를 금지하는 것은 시장 원칙과 공정 경쟁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정부가 집중 육성하고 있는 주요 산업이 영향을 받게 돼 EU와 중국 간 더 심한 마찰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단순한 통신 보안을 넘어선 EU의 기술 주권 확보 시도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첨단기술 제조력과 미국 빅테크의 서비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주체적인 경제 안보 노선을 택했다는 얘기다.
베이징=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