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극장)는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 전설적인 거장들이 이끌어온 세계 최정상급 오페라극장이다. 명문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속한 단체로, 웬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고선 객원 자리 하나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프란츠 벨저-뫼스트 사임 이후 약 6년간 음악감독 자리를 공석으로 둘만큼 콧대 높은 이 극장이 2020년 새로운 수장으로 낙점한 인물이 있다. 2009~2021년 파리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2014~2020년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거장 반열에 오른 지휘자 필리프 조르당(51)이다.
세계적으로 오페라와 교향악 모두에서 최고 수준의 지휘 실력을 인정받는 마에스트로는 많지 않다. 그의 내한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조르당이 오는 29일(롯데콘서트홀)과 30일(예술의전당)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한다. 그가 한국 악단과 호흡을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협연자 없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으로 청중을 만난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조르당을 21일 화상으로 만났다.

지난해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 자리에서 내려온 조르당. 그는 “빈 심포니에서 지휘자로서 기초를 다졌다면, 빈 슈타츠오퍼에선 공연을 위해 지휘자의 모든 감각을 확장하고, 음악을 새롭게 듣고 느끼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며 “나의 손짓, 표정 하나하나에 놀라운 사운드가 만들어질 때면 더없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음악이 삶의 중심인 빈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시간은 소중한 기억이자 큰 영광으로 남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조르당이 지휘자를 꿈꾼 건 아홉 살 무렵의 일이다.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지낸 지휘자 아르민 조르당의 아들인 그는 “집에 돌아다니는 아버지의 악보를 읽고, 공연 리허설을 따라다니며 많은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드는 지휘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가 여느 지휘자와 달리 콩쿠르 우승에 기대지 않고, 20살이 되자마자 독일 울름 시립극장의 카펠마이스터(수석지휘자)로 활동하며 일찍이 현장 경력을 쌓은 것도 아버지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오페라로 지휘를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오페라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무대 연출과 기술진까지 통솔해야 하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필요한 기교와 역량을 빠르게 키울 수 있는 분야거든요. 전 지휘자라면 오페라와 교향악 둘 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쪽에만 커리어가 치우쳐져 있다면, 지휘자로서 일의 절반만 하고 있다는 것이죠.”

조르당은 1998~2001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를 거쳤다. 이후 ‘바그너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정상급 무대에 연이어 데뷔하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바렌보임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했다.
“바렌보임은 악보에 담긴 의도나 악상 전환 타이밍, 소리의 질감 등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도, 나의 어떤 말에도 절대 답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음악에 정답이란 없고, 나이가 들어도 지휘자로서 올바른 질문을 이어가고 해결책을 찾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를 통해 알 수 있었죠.”
조르당은 악보의 음표나 기본적인 지시문은 물론 성악가들의 가사까지 전부 원어로 외우는 ‘치열한 노력파’로도 유명하다. 그가 지휘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무엇일까. 조르당은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단을 통제하는 건 중요하지만, 공연이 끝났을 때 누구라도 음악이 어딘가에 구속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해선 안 된다”며 “지휘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작품이 스스로 살아 숨 쉬도록 여유 공간을 만들어주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전 공연을 준비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꼼꼼한 악보 암기도 그중 하나죠. 음악에 완벽한 건 없지만, 이상(理想)을 향한 길은 있다고 믿거든요. 그러나 일단 연주가 시작됐다면, 지휘자는 음악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죠. 물론 제게도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요(웃음).”

조르당은 이번 공연에서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무대에 올린다. 그는 “두 작품은 ‘삶과 죽음’을 다루는 동시에 극도의 절망감, 상실감, 슬픔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했다. “브루크너 작품을 지휘할 땐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방해하지 않고, 무언가 억지로 만들어내려 애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저 그의 음악을 믿어야 하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존재한다는 말을 음악으로 전하고 싶어요.”
조르당은 내년부터 주 활동지를 프랑스로 옮긴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취임이 예정돼 있다. 그는 “프랑스 악단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으로 ‘국립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싶다”며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더 나은 세상이 되는 데 기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