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학과 풍자가 담긴 조선시대 서민의 그림 민화(民畵)는 사실 칭찬보다 폄하를 받은 역사가 더 길다. 제작 당시인 조선시대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민화를 속화(俗畵), 즉 저속한 그림이라고 부르며 깎아내렸다. 궁중 화가(화원)나 선비가 그린 사군자와 달리,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민중이 그린 품격 없는 그림이라는 게 이유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민화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민화의 독창성과 자유로운 매력이 뒤늦게 재조명된 건 ‘민족적 정체성 확립’이 과제로 떠오른 1970년대에 들어서다.
반면 지금 민화의 위상은 예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K-컬처’ 바람을 타고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덕분이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기름을 들이부었다. 작품 속 인기 캐릭터인 호랑이(더피)와 까치(수지)는 민화 장르인 까치호랑이 그림(호작도)에서 따온 것. 덕분에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의 문화상품 ‘까치호랑이 배지’는 박물관 최다 판매 상품 기록(약 9만 개)을 새로 썼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
지금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구관에서 열리고 있는 민화·궁중화전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가 국내외 미술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래 보기 드문 수준과 밀도를 자랑하는 민화전이다. 1970년 국내 상업화랑 1호 갤러리현대를 창업한 박명자 회장이 지난 세월 수십년간 눈여겨본 민화·궁중화들 중 추리고 추린 27점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민화의 가장 큰 특징은 민중의 소망이 여과 없이 담겨있다는 것. ‘매화 책거리’에 들어간 수박 등 씨 많은 과일들은 다산을 기원하는 뜻이다. 지금 가장 뜨거운 민화 장르인 까치호랑이 그림들은 민화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호랑이가 담뱃대를 물고 토끼가 시중을 드는 그림을 비롯해 다양한 포즈와 구도의 작품이 나와 있다. 물고기들이 입을 맞추는 그림이 그려진 병풍에 담긴 옛 사람의 해학, 일제강점기 무렵 제작돼 달리는 기차가 그려져 있는 화조산수도(花鳥山水圖)에 녹아 있는 융통성이 관람객을 절로 미소짓게 한다. 박명자 회장은 “민화는 창의성과 시대성, 예술성을 갖춘 한국 현대미술의 모태”라고 강조했다.



수준 높은 민화들과 함께 나온 궁중화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각별한 재미다. 털 하나하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인상적인 ‘호피도’가 대표적이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노는 ‘쌍룡희주도(雙龍戱珠圖)’는 사악한 기운이나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邪)의 의미가 담긴 궁중화다. 대한제국 선포(1897) 후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된다. 전시 자문을 맡은 정병모 전 경주대 교수는 “궁중화와 서민의 그림인 민화가 엄격히 구분돼 있다는 통념과 달리, 19세기 말~20세기에는 두 장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수준을 높여 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서도 민화에 열광”
갤러리현대 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는 이런 민화 등 전통회화를 계승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 ‘화이도(?以道)’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5’ 후원 작가인 김지평의 작품을 비롯해 김남경, 박방영, 안성민, 이두원, 정재은 등 작가 6명의 작품 75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갤러리현대는 2016년 예술의전당과의 공동 기획전인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전’, 미국 뉴욕 찰스왕센터·캔자스 스펜서 미술관·클리블랜드 미술관 순회전, 2021년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 등을 통해 국내외에 전통 미술을 소개해왔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부회장은 “해외 순회전 당시 민화를 처음 접한 미국 미술관 관계자들이 방한할 때마다 ‘민화 풍의 현대 한국 작가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며 “앞으로도 전통 민화의 해외 순회전과 함께 전통을 잇는 현대 작가들을 소개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관람은 무료.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