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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새 역사를 쓴 금기숙, 철사와 구슬로 꿰어 지은 순백의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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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새 역사를 쓴 금기숙, 철사와 구슬로 꿰어 지은 순백의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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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 갈망해 온 소망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 궤적을 남긴다. 미대 진학을 원했지만 의류학을 공부하게 된 소녀가 한 올 한 올 꿰어 나간 인생도 그랬다. 옷을 캔버스 삼아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한국 패션아트 1세대 금기숙 작가의 이야기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각 국가의 선수단을 안내하는 피켓 요원이 축제의 시작을 환하게 밝혔다. 한복 위에 새하얀 눈꽃송이가 내려앉은 듯 우리 전통 의상의 구조와 선을 닮았으면서도, 요정의 옷장에서 막 꺼내입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자태가 전 세계인을 홀렸다. ‘눈꽃요정’으로 불리며 화제가 된 이 의상은 금기숙 작가의 작품으로, 금 작가는 한국 ‘패션아트’의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는 의복을 예술로 바라본 1960년대 미국의 ‘Art to Wear’ 운동을 재해석해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감꽃 목걸이를 만들던 소녀


    지난 12월, 작가는 40여 년의 노고가 담긴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 58건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13억 1천만원, 혹은 그보다 더한 상당의 가치다. 기증을 기념하며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금기숙 기증특별전 ‘Dancing, Dreaming, Enlightening’이 진행되고 있다. 전시는 총 5개의 구성으로 나뉘어 작가의 창작 여정을 천천히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지난 1월,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작품만큼이나 해사한 미소의 금기숙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30벌의 피켓요원 의상을 제작했다. 그는 “기한이 있는 일을 혼자 작업해야 해서 무척 힘들었지만, 어쩌면 지금과 연결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불현듯 떠오른 이 기억은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공간에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야기가 됐다.

    “서너 살이나 됐을까. 초여름에 비가 오면 담황색 감나무에 열린 감꽃이 후루루 떨어져요. 울퉁불퉁한 뒷마당 웅덩이에 빗물이 고이고, 바람이 불면 물결을 따라서 꽃들이 한쪽으로 모이기도 하고... 어머니가 무명실을 손에 쥐어주면 감꽃을 하나하나 꿰면서 뜯어 먹기도 했죠. 실에 잔뜩 꿰어 자랑하면 어머니가 양 끝을 묶어서 목에 걸어줬어요.”





    수십 년이 흘러 명주실은 철사가, 감꽃은 구슬과 리본이 돼 패션과 공예, 디자인을 넘나드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는 주로 구슬이나 노방, 스팽글, 버려진 소재 등을 활용한다. 초창기에는 꽃다발을 만들고 남은 철사와 한복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 천 등을 이용했고, 지금은 버려진 단추나 빨대, 스티로폼 등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자원 재활용에 대해 작가는 그저 대세에 따른 것이라며 겸손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작은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마음이 녹아 있었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니 생명 하나하나 모두가 귀하고 예뻐요. 어린 친구들이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밉다’하는데 사실 한 명 한 명 다 예쁜 거지요. 모두 다르기 때문에요. 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답니다.”





    그는 자연에서 만난 생명에서 삶을 본다.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에서 인생을 발견했다. 퍽퍽한 흙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연꽃은 더러운 물을 헤치고 나와 비로소 꽃을 피운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꽃봉오리만큼은 우아하고 순수하다.

    작가는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삶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나 자신”이라며 “이렇게 고매한 연꽃의 특성을 작품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 지점에서 출발해 1990년대 연화를 모티브로 작업한 것이 최초의 드레스 작품이 됐다. 진흙빛이 연상되는 철사를 꼬아서 엮은 후, 물과 이파리 색, 그라데이션을 뽐내는 연꽃의 색상까지 한 드레스 안에 담았다. 이번 전시에는 당시 작품을 재해석한 연화드레스를 선보인다.

    그림자까지가 작품

    오랜 시간 작품을 만들면서 작업방식도 변화해 왔다. 초창기에는 철사를 동그랗게 엮었다. 하지만 작품과 천장을 연결해 공중에 매달아 전시해야 하는 작품의 특성상, 동그란 형태의 철사들에는 힘이 분산되지 않아 이내 느슨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거미줄이 작가의 영감을 자극했다. 거미줄 형태의 꼬임으로 여러 개의 유닛을 제작해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 이 방식으로 제작해 직관적인 거미줄 형태가 눈에 띄는 작품 ‘Spider Lady:Web Dress’ 또한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후에는 짜임의 특정한 형태보다는 균형을 중심으로 와이어를 잘라가며 엮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공중에 전시된다. 벽에 걸 수 있는 평면 작업이 아닌, 사람이 실제로 입을 수도 있는 입체 작업이기 때문. 천장과 이어진 낚싯줄을 통해 허공에 떠 있는 작품은 위치나 조명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만든다.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 꼭 바닥까지 살펴야 하는 이유다. 그림자까지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 관람객이 맨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작품 ‘백매’ 역시 마찬가지다. 검은색 바닥과 벽을 배경으로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작품은 눈부신 은빛 와이어와 서리꽃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자태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작가의 정원에서 매년 봄 하얀 꽃을 피우던 매화나무가 모티브가 됐다. 투명 비즈를 사용한 이 작품은 빛에 따라 미세하게 반짝이며 숨을 쉬고, 그 아래로는 금방이라도 작품을 태우고 날아갈 듯한 구름 모양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입기 위한 옷 너머의 것

    반세기에 달하는 시간 동안 작가는 다채로운 발자취를 남겼다. 비즈, 노방, 산호, 호일, 빨대, 스펀지 등 철사에 꿰는 재료와 형태의 스펙트럼이 넓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의상에서 조형으로, 또 조형에서 공간으로 확장돼 가는 작가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가의 직물 작품이자, 1995년 제1회 광주 비엔날레 국제의상전에 출품된 ‘진사 연화 청자 드레스’부터 붉은 철사와 산호로 만든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선보인 피켓요원 의상 등이 전시된다. 실제 보석으로 만든 작품도 있다. 손자가 탄생하며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크리스털 제품 기업 스와로브스키로와 협업한 색동저고리다.




    한복 작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축이다. 금 작가의 예술 세계는 조선 시대 복식 미학 연구에서 시작했다. 때문에 서양의 드레스만큼이나 한복의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는 것에도 오랜 관심을 두고 다양한 형태의 한복을 만들어왔다. 저고리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남성의 겉옷인 ‘직령’과 학(鶴)의 깃털로 만든 옷이라는 의미가 담겨 조선시대 사대부나 선비들이 입던 ‘학창의’ 등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서양의 드레스에 비해 평면적이라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부분은 비즈의 밀도감으로 리듬감을 주는 방식으로 선과 색을 강조했다.



    작가의 패션아트는 신체를 벗어나 공간 전체로 확장된다. 박물관 1층 천장의 설치 작업과 평면의 벽 위에 부조 형태로 완성된 작품은 벽면 너머를 상상하게 하고, 앞으로 작가가 선보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언젠가 커다란 공간에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주제로 작업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그림 그리는 일과 옷 짓는 일, 출발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목적지는 같았던 길을 부지런히 걸어온 작가는 종착지에 다다라 배운 인생의 깨달음을 나눠주었다.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너무 집착하며 사는 것 같아요. 무언가에 매달려서 꼭 그걸 안 하면 죽는 것처럼. 엉뚱한 것에 에너지를 소비하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정작 소중한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여러 사정을 두루 살피면서 순응하며 살다 보면 또 다른 좋은 기회가 분명히 와요. 저도 그걸 이제야 깨달았네요.”

    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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