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송승환이 국립정동극장의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에서 주인공 노먼 역으로 분해 무대를 압도하는 열연을 펼쳤다. 이번 공연은 그간 여러 작품에서 주로 권위 있는 '선생님'이나 '회장님' 역할을 맡아온 그가 타인을 보좌하는 '드레서'로 변신해 선배 배우 박근형, 정동환을 보필하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기획 단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더 드레서'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작가로 잘 알려진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겨울 영국 동북부의 한 지방 극장을 배경으로 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 공연을 앞둔 노배우 '선생님(Sir)'과 그의 곁에서 16년간 옷 수발을 들며 그림자처럼 지내온 드레서 '노먼'의 관계를 다룬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연극이라는 예술을 놓지 못하는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 본능과 무대 뒤편의 치열한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송승환이 연기한 노먼은 극의 실질적인 화자이자 관객과 무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평소 중후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온 그는 이번 무대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노배우의 변덕과 히스테리를 받아내는 노먼의 일상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특히 극 중 '선생님' 역을 맡은 박근형, 정동환과의 호흡은 이 연극의 백미다. 현실 세계에서도 대선배인 이들을 무대 위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그의 모습은 드레서라는 직업적 특성을 넘어선 인간적인 유대감을 보여준다.
송승환은 시각 장애를 겪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 동선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소화해냈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그의 '발성'이다. 수십 년간 다져진 또랑또랑하고 명확한 목소리와 발음은 객석 구석구석까지 노먼의 대사를 오롯이 전달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담아낼 줄 아는 노련한 배우의 힘을 보여준 것.

극중 노먼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선생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오로지 타인을 위해 헌신하며 느낀 애증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품고 있다. 송승환은 노배우의 정신적 붕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먼의 절박함과 그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냉소적인 유머를 능수능란하게 교차시켰다.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리어왕'으로 빛날 수 있도록 화장을 시키고 옷을 입히며 끊임없이 격려하는 그의 연기에는 삶의 비애와 예술에 대한 숭고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송승환의 이러한 열연은 그의 지난 활동 궤적과 궤를 같이한다. 1965년 아역 배우로 데뷔한 그는 드라마, 영화, 연극을 종횡무진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배우에 머물지 않고 제작사 PMC프러덕션을 설립해 한국 공연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난타'를 기획했다. '난타'는 한국 최초로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송승환은 제작자로서의 역량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또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아 한국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며 국제적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제작자이자 총감독으로서 화려한 정점에 섰던 그가 다시 소극장의 드레서 역으로 돌아온 것은 그 자체로 연극적인 서사를 완성한다. 황반변성으로 인한 시력 저하라는 배우로서 치명적인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한계를 소리에 집중하는 연기로 극복하며 '더 드레서'라는 작품을 직접 선택하고 제작에 참여했다.
이는 노먼이 포화 속에서도 연극을 이어가려 했던 모습과 묘하게 겹치며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더 드레서'는 단순히 배우와 드레서의 우정을 보여주는 신파극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왕을 연기하지만 현실에서는 노쇠하고 나약한 노배우, 그리고 무대 뒤에서 왕을 만드는 실질적인 주역이지만 끝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드레서의 대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송승환은 노먼이 겪는 존재론적 허무를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시키며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가"라는 노먼의 절규는 곧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송승환의 연기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하다. 과장된 몸짓 없이도 드레서 특유의 기민한 움직임을 표현했고, 박근형과 정동환이라는 거대하고 선 굵은 배우들 사이에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선배 배우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유연하게 받아내며 극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모습은 그가 왜 '선생님' 소리를 듣는 배우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특히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조절로 관객들의 집중력을 고조시킨다.
제작자의 외피를 벗고 오로지 연기라는 본질로 돌아온 송승환은 이번 무대를 통해 배우의 진정한 내공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박근형, 정동환이라는 거장들과 함께 빚어낸 무대 뒤의 드라마는 연극이 왜 여전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예술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송승환이 보여준 노먼의 헌신과 열정은 그가 걸어온 60년 가까운 연기 인생의 정수가 담긴 결정체였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