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외교와 남북 관계는 서로 연계돼 있습니다. 두 분야가 따로 노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북한에 감성적으로 호소하거나 일방적으로 양보 조치를 하는 것은 (남북 관계 개선에) 큰 효과가 없을 겁니다.”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15일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이재명 정부가 택해야 할 바람직한 대북 정책 방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윤 이사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미국과 북한의 대화, 미·중 및 북·중 관계 변화 등 국제 정치 상황이 변하면 남북 관계도 변화 모멘텀(계기)이 생길 수 있다”며 “주변 대국들의 외교 정세 변화를 치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거시적 그림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남북 관계 개선의 동력을 창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윤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외교·안보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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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세계 외교·안보 지형엔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규범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법은 멀어지고 주먹은 가까워진 세상이죠.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스스로 포기해 도처에서 분쟁과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가치 기반 동맹과 자유무역도 약화됐고 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올해도 이어지겠지요.
“원칙이 사라지고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 동맹과 가치가 실리에 따라 거래되는 세상이 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각국 정책결정자들의 오판 가능성, 분쟁 발생 가능성도 함께 높아질 겁니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어떨는지요.
“미국의 리더십 포기로 중국과 러시아, 북한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봅니다. 예컨대 트럼프는 오는 4월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만 문제에 대해 중국과 ‘빅 딜(big deal)’을 성사하는 데 관심이 큽니다. 미국 경제가 나빠지면 더욱 여기에 매달릴 겁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요.
“대만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약화하고 중국의 파워가 세지면서 역내 불안정성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유럽에 대한 비판 기조가 강화된 것을 고려하면 러·우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올해 한반도 안보 전망은 어떻습니까.
“미국과 중국 모두 공식적으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실질적으로 ‘이미 핵을 갖고 있는 국가’로 보는 듯합니다. 이런 전제하에 비핵화가 아니라 관리 모드로 들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NSS에선 ‘한반도 비핵화’가 빠졌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올해 미·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중국도 작년 11월 군비통제 백서에서 비핵화를 삭제했습니다. 미국조차 비핵화를 내세우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이 주도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한국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한국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진입한 것이죠. 비핵화가 아니라 핵 동결 또는 감축을 대가로 제재를 완화하는 핵 군축 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게 현실화하면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폐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할 수 있어요.”
▷미·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은 어떤가요.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이르면 상반기 러·우 전쟁이 종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국제 정치 국면이 시작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로운 전략을 고려할 겁니다.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결코 불리할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한반도엔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라는 점에선 긍정적입니다. 다만 미·북 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안보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겁니다.”
▷한국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한·미 정상 간 신뢰 구축이 핵심입니다. 이어 조선·방산·원전 등 한·미 산업 협력 카드를 적극 활용해 미·북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4월 미·중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 변화에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북한 당국자에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어요. 다만 김정은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압력이나 권고에 따라 남측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언제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바꿀까요.
“미·중 회담 외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여부, 미·북 대화 재개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뒤 전략적 계산을 할 것입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치 환경에서 어떤 선택이 최대 이익이 되는지를 따진 결과일 겁니다. 현재로선 남북 관계 개선 의지가 크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최근 미국의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가 미·북 대화 등에 영향을 미칠까요.
“북한의 핵 보유 집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혹시 베네수엘라 국민 저항 등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면 북·미 협상에 임하는 미국 입지가 약화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E(교류)·N(관계 정상화)·D(비핵화)’ 대북 구상을 내놨습니다.
“현실적인 로드맵이라고 봅니다. 비핵화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면 북한과 대화나 협상 자체가 열리지 않습니다. 비핵화 목표를 최종 단계로 설정하고 우선적으로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시작하자는 전략입니다.”
▷END 구상이 실현될 수 있을까요.
“현재는 북한의 대남 적대 정책으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러·우 전쟁 종전 등 국제 정치 사정이 바뀌면 북한의 전략적 판단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요.
“일단은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이 대규모 무력 충돌로 확산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소통 채널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중장기적으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시적 그림에서 미국·중국·러시아와 외교를 통해 남북 관계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주변국을 설득할 논리가 있을까요.
“한반도 안정은 미국엔 안보 비용 절감, 중국엔 일대일로와 평화경제특구 연계, 러시아엔 한반도 종단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연결이라는 실질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국제 대북 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공간은 있습니까.
“대북 제재는 미국 주도로 이뤄집니다. 한국이 단독 조치를 취해도 기대만큼 효과를 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주파 진영’에선 대북 제재 완화가 남북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고 합니다.
“미국 등 다른 국가들은 계속 제재하는데 우리만 푼다고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대북 정책 주도권을 놓고 외교부와 통일부가 갈등을 벌입니다.
“한 부서가 A라고 말하는데 다른 부서가 B라고 말하면 상대국은 어느 것이 진짜 의중인지 혼란을 겪습니다. 한목소리를 내야 하고 그걸 조율하는 곳이 국가안보상임위원회입니다. 정치권에서도 정부가 한목소리를 내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 윤영관 이사장은
△1951년 전북 남원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박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미래전략연구원·한반도평화연구원장
△외교통상부 장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배성수/이현일 기자 mustafa@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