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전주곡 리사이틀은 연주회라기보다, 관객을 천천히 걷게 만드는 ‘전시’에 가까웠다. 이 아이디어는 음악이 아닌 곳에서 시작됐다. 과거 일본의 한 미술관에서 그는 정해진 동선도, 설명도 없이 관람객이 스스로 길을 찾게 하는 전시를 만났다. 관객들은 아무 정보 없이 작품을 만나며 자신만의 의미로 전시를 받아들여야 했다. 지메르만은 바로 이 방식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관객이 걸어다니는 전시회 같은 공연
서사가 확실한 대곡 대신, 모두 짧고 독립적인 성격의 전주곡들이었다. 각각의 곡은 하나의 전시 작품처럼 놓여 있었고, 관객들은 그사이를 이동하며 스스로 의미를 발견해 나갔다. 그리고 지메르만은 물었다. “당신에게 전주곡은 무엇입니까?”그 출발점은 바로 C장조였다. 스타트코프스키와 바흐의 C장조 전주곡으로 문을 연 것은 전주곡이라는 형식의 기원을 상기시켰다. 조성의 중심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울림, 그리고 음악이 아직 어떤 방향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 바로 C장조였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하듯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후 공연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이날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전주곡이라는 형식을 공유하지만, 시대와 감각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몇 개의 길이 열렸다. 지메르만은 그 길들을 미리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음악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다른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우선 스크리아빈, 드뷔시, 시마노프스키로 이어지는 흐름은 전주곡의 색깔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과정처럼 들렸다. 이 세 곡이 묶이는 순간, 무대 위에는 오묘한 색감이 빚어졌다. 마치 서로 다른 색의 잉크를 한 방울씩 물통에 떨어뜨린 것처럼, 색들은 풀어지고 겹치며 서서히 섞였다.
스크리아빈의 전주곡에서 화성은 방향보다 색채를 먼저 말하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드뷔시에선 음악의 중심이 조성에서 색채와 분위기로 이동했다. 지메르만의 연주로 소리는 더 이상 방향을 주장하지 않고, 공기처럼 번지며 공간의 질감을 바꿨다. 시마노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지메르만은 롯데콘서트홀의 울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노트를 강하게 연주하고, 그 울림으로 빈 공간을 메꿨다. 소리가 명료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어 자칫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바흐부터 스크리아빈 까지
바체비치, 쇼팽 그리고 드뷔시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면 또 새로운 길이 놓여 있었다. 색깔보다도 리듬이 음악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가 보였다. 바체비치의 작품에선 날카로운 리듬이 음악을 꽉 붙잡으며, 긴장을 놓지 않았고, 쇼팽의 전주곡 ‘빗방울’에서는 반복되는 리듬이 작품의 배경을 묘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드뷔시의 ‘요정의 춤’에 이르면 리듬은 더 이상 무게를 갖지 않았다. 음악은 가볍게 떠올랐다. 관객들이 스스로 발견해낸 또 하나의 길이었다.이 긴 전주곡 여정 속에서 중심처럼 느껴진 작곡가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흐였다. 중간 무렵 바흐의 파르티타가 등장할 때, 우리는 구조와 질서라는 오래된 언어로 잠시 되돌아왔다. 비교적 익숙한 쇼팽의 전주곡은 현재 감정의 위치를 가늠하게 했다. 시마노프스키 전주곡 Op.1-7 뒤에 쇼팽의 전주곡 Op.28-7이 이어지는 지점, 그리고 바체비치의 전주곡과 푸가 뒤에 쇼팽의 전주곡 Op.28-15 가 놓인 순간은, 지금 음악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이 전주곡 여정은 어디서 멈춰야 했을까. 공연 후반부에 배치된 작곡가들은 카푸스틴과 라흐마니노프였다. 카푸스틴에서는 클래식과 재즈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전주곡이 여전히 ‘현재의 언어’로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증명했고, 라흐마니노프에서는 전주곡 형식이 감정의 크기를 어디까지 품을 수 있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전주곡은 역사 속에 머무르는 장르가 아니었다. 시대를 지나며 그 경계를 넓혀왔다. 이날 전주곡은 지메르만의 연주를 통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언어로 무대 위에 존재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