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사과는 때로는 고도의 위기 관리 전략으로 작동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진 효과적인 사과는 유권자의 감흥을 자극하고 논란 확산을 막는다. 과거의 잘못에서 미래의 가치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출구 전략’이 되기도 한다.2012년 9월 박근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과거사 사과’가 그랬다. 당시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부상하는 가운데 박 후보가 “인혁당 판결은 두 개”라고 발언해 중도층 지지율이 급락했다. 곧바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발생한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한 것”이라며 공개 사과했다. 지지율이 더 밀리면 대선 자체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딸이 아니라 대선 후보로서 아버지의 과오까지 비판한 것이다. 경쟁자 안 후보까지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평가했다. 박 후보 지지율은 반등했고 약 석 달 후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했다.
물론 한국 정치사엔 반대 사례가 훨씬 많다. 떠밀려 하는 사과, 책임을 회피하는 사과, 구체성 없는 사과는 별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악재가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해 수차례 사과했지만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김건희 여사 관련 ‘포괄적 사과’ 역시 임기 내내 야당에 공세의 빌미만 제공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7일 12·3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했다. 작년 8월 대표 취임 이후 처음으로 “상황에 맞지 않는 잘못된 수단이었다”며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사과는 나중에 어느 쪽으로 기록될까. 작년 12월 3일 “의회 폭거에 맞선 계엄”이라고 한 발언보다는 분명 진전된 태도다. 하지만 유권자 초기 반응은 ‘실패한 사과’ 쪽에 더 가깝다.
6~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정당 지지도는 26%(한국갤럽 기준)로 전주와 같았다. 김병기·강선우 의원, 김경 서울시의원의 공천 뇌물 의혹과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각종 의혹이 쏟아져도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5%포인트 오른 45%를 기록했다. ‘6·3 지방선거 결과 기대’ 조사에서도 ‘여당 후보 다수 당선’이 43%, ‘야당 후보 많이 당선’이 33%였다. 작년 11월 42%와 35%, 작년 12월 42%, 36%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장 대표는 작년 말까지 고정 지지층 결집에 집중하겠다고 고집하다가 사과 타이밍을 놓쳤다.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 정리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중도층 외연 확장에도, 핵심 지지층 결집에도 성과를 못 냈다. 사과 직후 계엄 옹호 인사 등을 신임 정책위의장과 지명직 최고위원에 지명한 것도, 당내 반발을 산 윤리위원회 구성도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이젠 반전 카드가 필요하다. 장 대표는 사과와 함께 내놓은 쇄신안을 실제 행동으로 입증해야 하는 더 어려운 국면에 들어섰다. 당명 개정부터 하겠다며 관련 절차에 들어갔지만 쇄신 없는 간판 교체는 오히려 불신만 키울 수 있다. 그보다는 청년 중심 정당, 전문가 중심 네트워크 정당으로 변하겠다는 약속부터 실천하는 게 먼저다. 국민의힘 싱크탱크로 불리는 여의도연구원 홈페이지 첫 화면에 지금도 작년 2월 열린 토론회 자료가 걸려 있는 현실은 상징적이다. 이러고도 전문가 중심 정책 정당을 표방할 수 있나. 민주당 정책 반대를 넘어 보수 가치를 담은 정책 대안부터 제시해야 이번 지방선거 대응이 가능하다.
더 시급한 건 ‘이기는 선거를 위해 연대하겠다’는 약속의 실천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부터 유승민 전 의원,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까지 아우르는 정치력을 장 대표가 발휘하느냐가 관건이다. 대의를 위해 사적 감정을 억누르는 절실함과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최근 여권 관계자들은 “국민의힘이 다음달 설 연휴 때까지만 지금처럼 헤매고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설 이후 출마 선언이 본격화되면 선거 구도와 지지율이 고착화해 여권이 지방선거에서 대승할 것이란 계산이다. 다음달 윤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재판 선고로 야권이 추가 분열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설 이후 또 비대위 체제가 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야권 인사가 늘어나는 이유다. 행정·입법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빼앗기는 보수의 몰락, 어쩌면 장 대표 본인의 정치 생명 위기를 막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