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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일로 합시다"…꿈에 부풀었던 여행 가이드의 좌절 [조대환의 영미계약법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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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일로 합시다"…꿈에 부풀었던 여행 가이드의 좌절 [조대환의 영미계약법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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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년 영국 런던, 여행 가이드였던 호크스터(Hochster)는 설레는 마음으로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대륙을 여행할 계획이던 귀족 드 라 투르(De la Tour)와 전속 가이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여행은 단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과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였고, 가이드에게 여행을 떠나는 귀족과의 전속 계약은 수입과 동시에 명예를 보장해 줄 기회로 여겨졌다. 호크스터 역시 그 여행이 자신의 커리어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꿈에 부풀었던 여행 가이드의 좌절
    그러나 출발일이 다가오기 전 드 라 투르는 갑작스럽게 편지를 보내 "미안하지만, 여행을 안 가기로 했다. 계약도 없던 걸로 하자"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호크스터 그를 상대로 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드 라 투르는 그 소송이 '시기상조'(premature)라며 계약 이행일인 여행 출발일 전까지는 계약 위반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전까지 영국 법원은 계약 이행을 약속한 날이 되기 전에는 계약 위반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법원은 "계약을 강제하지 않는 한 달리 구제 방법이 없는 경우, (손배소를 제기하는 것이) 시기상조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계약 상대방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명백히 선언했다면 굳이 이행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이 선언한 그 순간 이미 계약 위반이라고 보고 호크스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Hochster v. De la Tour, 118 Eng. Rep. 922, 926 (Q.B. 1853)).

    당시 영국 법원이 전통적으로 취하고 있던 관점은 '계약 위반을 문제 삼으려면 계약의 이행일, 즉 약속한 날이 도래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Hochster v. De la Tour 사건에선 계약을 지키지 않겠다는 명백한 선언이 있었다면 굳이 이행일까지 기다릴 이유 없이 즉시 계약 위반으로 소송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해당 판결 이후 '이행기 도래 전 이행 거절의 원리'(anticipatory repudiation doctrine)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미리 깬 약속에도 배상 책임이 있다
    계약은 쌍방이 서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는 데서 출발한다. 일방이 약속을 지킬 의사나 능력이 없다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약속한 이행일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원칙적으로 계약 당사자는 계약에서 정한 이행기가 도래한 때에 상대방에 이행을 청구할 수 있지만, 이행 의무를 지는 당사자가 이행기가 도래하기 전 이행기가 도래한 시점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 즉 '이행기 도래 전 이행 거절'을 한 때에는 상대방인 피해 당사자의 잔존 이행 의무는 면제돼야 할 것이다. 계약 일방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이후에도 상대방에게 이행 의무를 계속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건 형평의 관점에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행기 도래 전 이행거절이 있는 경우 피해 당사자는 전면적 계약위반(total breach)에 따른 손해 배상을 즉각 청구할 수 있다.
    민법상 '불안의 항변권'과 비슷한 원리
    이와 비슷한 원리는 우리 법에도 존재한다. 민법 536조 2항은 계약 일방이 변제기 이전이라도 상대방의 재산 상태가 악화하거나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면 자기 채무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는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하고 있다. 상대방이 돈을 갚지 못할 것이 뻔하거나 계약을 지킬 수 없다는 불안이 합리적으로 존재한다면, 스스로의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없으며 상대방에게 이행 가능성을 보증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이행기 도래 전 이행거절과 우리 민법상 불안의 항변권 모두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게 확실하다면, 굳이 이행기까지 기다리며 손해를 키울 필요가 없다는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만 영국의 판례들은 계약 일방 당사자의 불이행 선언 즉시 계약 위반이 될 수 있어 피해 당사자가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법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우리 민법은 일방 당사자가 직접 이행 거절을 선언하지 않더라도 재산 상태나 정황상 계약 이행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 상대방 당사자가 이행을 미루고 안전장치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다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드 라 투르들
    Hochster v. De la Tour 사건은 계약 일방이 약속을 깨겠다고 미리 선언한다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희망 고문'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으며, 계약의 효력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도 상호 간에 더욱 큰 생채기를 낼 필요 없이 약속이 깨진 순간부터 이미 계약 위반이 성립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약속은 믿음 위에 서 있지만, 그 믿음이 이미 무너졌다면 그 즉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조언을 법이 건네고 있는 셈이다.

    상대방이 분명히 지키지 않을 약속이라면, 혹은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약속이라면 손 놓고 있지 말고 빨리 대처하는 편이 현명하다. 오늘날 산업 현장에도 수많은 드 라 투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이 대형 클라이언트와 3개월 뒤 런칭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한 달 뒤 클라이언트가 "예산이 부족해 프로젝트를 접겠다"고 통보했다면 계약상 이행 일자가 도래하지 않은 그 순간에 스타트업은 이미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된다. 건설 공사가 착공하기도 전에 자재 공급 업체가 납품 불가를 통지한다면, 그 순간부터 공사엔 차질에 생기며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약속일이 오기도 전에 약속이 무너지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이미 깨진 계약이라면 굳이 이행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법에 따라 계약을 조기에 파기해 피해 당사자를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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