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 위기 극복을 내세우며 지난해 5월 ‘비상경영’을 선포한 농협중앙회가 내부적으로는 방만한 예산 집행과 느슨한 내부 통제를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농협중앙회장은 두 곳에서 연봉 3억원이 넘는 보수를 받으면서 퇴직금으로도 수억원을 챙겼고, 격려금을 연 10억원 이상 집행했다. 정기대의원대회에서는 조합장들에게 220만원짜리 휴대전화를 무상 지급하는 데 23억원 넘게 썼다. 반면 성희롱을 포함해 임직원들의 비위 행위에 대해서는 단 한 건도 고발하지 않은채 눈 감고 넘어갔다.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 달랬더니..."비서실 카드지, 내 것 아냐"
8일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농협중앙회·농협재단 특별감사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감사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를 계기로 11월 24일부터 12월 19일까지 진행됐다. 농협중앙회에 대한 특별감사는 2009년 이후 17년 만이다. 변호사와 회계사 등 외부 전문가를 포함해 26명이 감사에 투입됐다. 통상 정기감사 인원이 5명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규모다.
감사 결과 농협중앙회는 이사회 구성부터 내부 통제까지 전반적으로 규정을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운영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사회 구성 과정에서 농업인 단체와 학계 추천을 받아야 하는 인사추천위원회를 제대로 꾸리지 않고, 인사총무팀이 일부 단체와 학계 인사를 비공개로 추천받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 이사회에서는 특별성과보수를 ‘1인 즉석 안건’으로 상정해 의결하는 사례도 있었다.

임직원 범죄 행위에 대한 대응도 부실했다. 규정상 범죄 혐의가 있는 임직원은 원칙적으로 고발해야 하고, 고발에서 제외하려면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농협중앙회는 2022년 이후 징계 21건 가운데 범죄 혐의가 있는 6건을 고발하지 않았고, 인사위원회도 열지 않았다.
성희롱 사건 처리 역시 형식에 그쳤다. 인사위원회는 인사총무팀이 검토한 징계 수위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징계위원회에는 여성 위원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피해자와 같은 성별의 위원을 3분의 1 이상 포함해야 한다.
방만한 보수·경비 집행도 도마에 올랐다. 농협중앙회장은 연 3억9000만원의 실비와 수당을 받는 한편, 회장직을 겸임한 농민신문사로부터도 연 3억원이 넘는 급여와 퇴직금을 수령했다. 전임 회장의 퇴직금은 4억2000만원에 달했다. 격려금 성격의 직상금은 사실상 제한 없이 사용됐다. 2024년 중앙회장의 직상금 집행액은 10억8400만원에 이르렀고, 전무이사와 감사위원장도 각각 1억8300만원, 2900만원을 집행했다. 해외 출장 시 1박당 숙박비 상한(250달러)을 최대 186만원 초과한 사례도 확인됐다. 원·달러 환율 1400원을 적용하면 1박에 220만원 이상 쓴 셈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해외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썼다"고 전했다.
금품 제공 관행도 심각했다. 신임 이사에게는 개인 소유 태블릿PC를 지급했고, 퇴임 시에는 전별금과 여행상품권, 순금 기념품을 제공했다. 2022년 정기대의원대회에서는 참석한 모든 조합장에게 220만원 상당의 휴대전화를 지급해 총 23억4600만원을 지출했다.
법이 정한 정보 공개 의무도 지켜지지 않았다. 농협중앙회장은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하지만 “업무추진비 카드는 비서실에 배정된 것”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불법 자금 써도 6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인식 퍼져있어"
계열사와 재단에서도 부실 운영이 드러났다. 농협경제지주는 2024년 약 81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음에도 이듬해 1월 상근 임원에게 특별성과보수를 지급했다. 학교법인 농협학원은 2025년 9월 15억9200만원을 지원받아 특정 초빙 교원에게 월 800만원씩, 9개월간 총 7200만원을 지급했다. 감사에 참여한 윤종훈 회계사는 “농협중앙회는 재계 10위권 규모지만 회계 관리 시스템과 인력 전문성은 크게 뒤처져 있었다”며 “휴대전화 지도 앱을 쓰는 시대에 혼자 종이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외부 통제가 약한 상황에서 내부 통제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농협중앙회 감사위원회와 조합감사위원회는 총 5명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3명이 중앙회나 계열사 전직 임원 또는 전·현직 조합장이다. 준법감시인 역시 내부 인사여서 실효성 있는 감시가 어렵다는 평가다.
이번 감사 과정에서 농식품부 감사팀은 강호동 농협중앙회장과 지준석 부회장에게 대면 문답을 요구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농협중앙회는 임직원 형사 사건 변호사 비용으로 공금 약 3억2000만원을 지출했고, 농협재단은 공금을 부적정하게 사용해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식품부는 “추가 증거 확보와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지난 5일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외부 전문위원들은 선거제도 개혁이 근본 대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상훈 변호사는 “농협중앙회와 단위조합에서 반복되는 문제의 뿌리는 선거제도”라며 “불법 자금 사용도 공소시효 6개월만 넘기면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앙회와 단위조합 선거 제도의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농식품부는 이달 중 ‘농협 개혁 추진단’을 구성해 선거제도와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논의하고, 협동조합기본법 개정 등 후속 입법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무조정실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이 참여하는 범정부 합동 감사 체계 구축도 검토하기로 했다.
그동안 정기 감사를 실시해 왔음에도 이런 관행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 김종구 농식품부 차관은 “정부도 책임을 통감한다”며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재발을 막겠다”고 말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