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업인 미국 퀄컴이 차세대 AP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대 수조원에 이르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계약이 성사되면 삼성의 ‘아픈 손가락’으로 꼽히던 파운드리 사업 정상화에도 속도가 붙는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CES 2026’ 현장에서 기자와 만나 “여러 칩 설계 기업 중 삼성전자와 가장 먼저 최신 2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을 활용한 위탁생산 논의를 시작했다”며 “조만간 상용화를 목표로 설계 작업도 끝낸 상태”라고 말했다. 퀄컴이 삼성 파운드리에 2㎚ 공정을 활용한 AP 생산을 맡기는 계획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계약이 최종 성사되면 삼성은 2022년 이후 끊긴 퀄컴의 최첨단 제품 생산을 5년 만에 재개한다. 퀄컴은 2021년까지 삼성 파운드리에 최첨단 AP 생산을 맡겼지만, 이후 대만 TSMC로 거래처를 돌렸다. 퀄컴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삼성이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퀄컴이 삼성 파운드리에 다시 눈을 돌린 것은 삼성이 낮은 수율과 발열 등 고질적인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삼성이 테슬라로부터 165억달러(약 24조원)에 이르는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AI6’ 생산을 수주하는 등 기술 신뢰도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퀄컴이 TSMC에만 맡겨 온 차세대 칩 생산을 삼성으로 이원화하려는 전략을 세운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TSMC에 밀린 삼성이 오히려 2㎚ 최첨단 공정으로 정면 승부에 나선 게 주효했다”며 “테슬라에 이어 퀄컴까지 고객으로 확보하면 더 많은 글로벌 기업 물량을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수율·발열이슈로 수주 발목…2나노 공정, 성능 대폭 끌어올려
TSMC 가격 올리자 삼성에 기회…'테슬라 24조' 물량도 양산 채비
삼성전자와 퀄컴의 관계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 힘들다. 여러 분야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다. 퀄컴은 삼성전자 모바일(MX)사업부에 스마트폰의 ‘두뇌’인 최첨단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납품하는 ‘을’이다. 동시에 엑시노스 AP를 개발하는 삼성 시스템LSI사업부와는 라이벌 관계다. 삼성 파운드리사업부에는 AP 생산 일감을 주는 ‘갑’이다.TSMC 가격 올리자 삼성에 기회…'테슬라 24조' 물량도 양산 채비
현시점에서 삼성은 퀄컴 AP를 대량 구매하지만, 퀄컴은 AP 생산을 대만 TSMC에 맡기고 있다. 2020년까지는 서로에게 일감을 주고, 제품을 사주는 ‘밀월 관계’였지만 이듬해부터 삼성의 첨단 파운드리 공정에서 수율·성능 문제가 불거지며 퀄컴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최첨단 2㎚(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으로 승부수를 건 삼성이 퀄컴을 다시 고객사로 맞이하면 파운드리사업 재건에도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2㎚ 라인 10% 퀄컴에 할애할 듯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퀄컴의 첨단 AP를 마지막으로 생산한 건 2021년이다. 당시 퀄컴의 스냅드래곤8 AP를 4㎚ 공정으로 생산했지만, 이후 발열을 잡지 못하면서 퀄컴의 최첨단 칩은 TSMC 몫이 됐다. TSMC는 작년 9월 나온 스냅드래곤8 엘리트 AP까지 퀄컴의 최첨단 제품을 싹쓸이했다.
이랬던 퀄컴이 삼성 파운드리에 손을 내민 건 퀄컴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공정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지난해부터 2㎚ 공정에서 시스템LSI사업부가 설계한 엑시노스 2600 AP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TSMC가 2㎚ 웨이퍼 가격을 계속 올리는 것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삼성은 TSMC가 3㎚ 공정으로 제조하는 스냅드래곤8 엘리트 5세대 AP를 2㎚ 공정으로 만들 계획이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6일(현지시간) 기자와 만나 “삼성전자와 2㎚ 칩 설계를 완료하고 성능 수정을 위해 웨이퍼를 교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용화를 앞둔 단계란 의미다.
업계에선 삼성이 경기 화성사업장 S3에 확보한 생산능력의 10%가량을 퀄컴 AP 생산에 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S3가 월 2만 장의 12인치 웨이퍼 제조 능력을 확보한 만큼 퀄컴 몫은 월 2000장이 된다. 삼성이 고객사에 제시하는 2㎚ 웨이퍼 가격이 장당 2만달러(약 2900만원)인 만큼 퀄컴 AP 생산으로 당장 약 6900억원의 연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체 수주액은 수조원에 이를 수 있다. 파운드리사업부 연매출(17조원)의 4% 수준이다.
◇‘근원 경쟁력’ 회복 신호탄
업계에선 삼성이 퀄컴 2㎚ 칩을 수주하면 ‘아픈 손가락’이던 파운드리가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알리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7월 미국 테슬라의 차세대 인공지능(AI) 칩인 AI5와 AI6를 잇달아 수주하며 기술 신뢰도를 인정받았다. 파운드리사업부 연간 매출을 훌쩍 넘는 165억달러(약 24조원)에 이르는 대형 계약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추가 발주를 언급한 만큼 수주금액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삼성은 테슬라 물량을 새로 짓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삼성은 2분기부터 테일러 1공장에 반도체 장비를 들이기 시작해 12인치 웨이퍼 기준으로 월 1만5000장 안팎의 생산 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레거시(구형) 공정인 8㎚ 수주도 잇따르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6월 발매된 게임기 ‘닌텐도2 스위치’에 장착되는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 엔비디아로부터 8㎚ GPU 추가 주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또 다른 미국 반도체기업 인텔의 8㎚ 칩셋 생산도 맡을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AI 붐 덕분에 파운드리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업계 1위인 TSMC가 생산 단가를 올리고 있는 만큼 2위인 삼성에 기회가 올 수밖에 없다”며 “파운드리도 정상화되면 전영현 반도체부문장(부회장)의 ‘근원 경쟁력’ 회복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강해령 기자 hr.ka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