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침체 국면에서도 한국 영화계는 최근 몇 년간 매해 한 편 이상의 천만 영화를 배출해 왔다. 2022년 '범죄도시2', 2023년 '범죄도시3'와 '서울의 봄', 2024년 '파묘'까지 흐름은 이어졌다. 그러나 지난해는 단 한 편의 천만 영화도 나오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극장이 사실상 멈췄던 2021년을 제외하면 이례적인 상황이다. 한국 영화 산업이 체감하는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뚜렷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한국 영화' 관객 수는 4328만3075명으로 전체 관객의 41.3%에 그쳤다. 최근 4년 가운데 가장 낮은 점유율이다. 신규 투자가 크게 줄어든 데다, 성수기를 겨냥한 대작들마저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한 영향이 컸다. 매출 역시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면 2010년 이후 처음으로 1조원을 밑돌며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작품 수와 규모, 완성도 모두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흥행이 특정 프랜차이즈와 팬덤 중심 콘텐츠에 집중되는 현상도 두드러졌다. '아바타', '주토피아', 마블 시리즈 등 이미 흥행력이 검증된 외화는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한국 영화 역시 '범죄도시'처럼 기존 관객층이 확실한 시리즈만이 불황 속에서도 성과를 냈다. 일본 애니메이션 또한 고정 팬층을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성적을 거뒀다. 반면 새로운 세계관이나 신인 감독의 작품은 관객에게 선택받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지금 극장가는 모험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며 "이미 성공 경험이 있는 IP나 시리즈가 아니면 투자와 배급 단계에서부터 문턱을 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배급사 관계자는 "관객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작품보다는 검증된 선택지를 고르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2026년 극장가가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관객 감소와 산업 축소 여파로 한국 상업영화 개봉 편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내년에는 굵직한 기대작들이 대거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뉴(NEW),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 주요 배급사가 내년 개봉을 예고한 한국 상업영화는 모두 22편이다. 코로나 이전 연간 40편 안팎이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배급사들은 무작정 편수를 늘리기보다 흥행 가능성이 높은 작품 위주로 라인업을 재편하고 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지금은 많이 만드는 것보다 잘 만드는 게 생존 전략"이라며 "손익분기점을 현실적으로 낮출 수 있는 기획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CJ ENM은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 2'와 최국희 감독의 '타짜: 벨제붑의 노래'를 선보인다. '국제시장 2'는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민주화 운동에 나선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대 갈등과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명한다. 2014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의 속편으로, 11년 만의 귀환이다. 원작 만화 4부를 다룬 '타짜: 벨제붑의 노래'는 변요한과 노재원, 일본 배우 미요시 아야카가 출연한다.
쇼박스는 장항준 감독의 사극 '왕과 사는 남자'를 2월 4일 선보인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다룬 작품으로 유해진·박지훈·유지태가 출연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1월 14일 '하트맨'을 개봉한다. '히트맨'으로 흥행에 성공한 권상우가 주연한 작품이다. 또 구교환 주연의 '부활남'과 임상수 감독의 '행복의 나라로'를 상반기 개봉한다. 탈옥수와 환자가 거액의 돈을 손에 넣으며 동행하는 이야기를 담았으며, 최민식과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다.

뉴(NEW)는 류승완 감독의 첩보 액션 영화 '휴민트'를 내년 유일한 개봉작으로 내세운다. 조인성이 국정원 블랙 요원으로, 박정민이 북한 보위성 조장으로 등장하며 2월 11일 개봉을 확정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는 내년 한국 영화 개봉 예정작이 7편으로 가장 많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호프'는 여름 개봉을 확정했다. 비무장지대 인근 항구 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황정민·조인성·정호연과 함께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해외 배우들이 출연한다.
업계에서는 전망을 두고 여전히 신중한 기류가 감지된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올해에도 관객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몇 편의 흥행작이 시장을 떠받치는 구조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아바타'나 '주토피아2' 등이 흥행하는 것을 보면 극장의 위기라기보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며 "지금은 흥행 성적보다 제작 환경을 정상화하고 인력을 유지하는 게 더 시급한 과제"라고 했다.
외화 라인업은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하다.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져스: 둠스데이'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빌런 닥터 둠으로 등장하며 12월 18일 개봉을 예고했다. 같은 날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파트 3'도 관객을 만난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토이 스토리 5', 20년 만에 제작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편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고대 그리스 신화 '오디세이아'를 각색한 영화 '오디세이'를 7월 15일 선보인다.
2026년 극장가는 한국 영화의 회복 가능성과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시험하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줄어든 편수 속에서도 관객의 선택을 받을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천만 영화의 명맥이 다시 이어질지 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