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캘린더 1월 1일자 메모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칼럼-희망’ 평소 같으면 ‘칼럼’이라고만 써 두었을 텐데 칼럼 일정을 공유하며 들은 당부의 말을 흘려보낼 수 없어서 키워드 하나를 적어 둔 것이다. 그리고 남은 12월을 보내는 내내 희망을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덕분에 12월이 희망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니 새삼 놀랍다. 그런데도 희망에 대한 글이 써지지 않아서 더 놀랍다. 절망적이다.그런데 문득 천양희의 시 ‘완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정신이 번쩍 트인다. 그제야 남편이 베란다에서 얼어 죽을 뻔한 식물을 거실로 옮겨 놓고 물을 주고 먼지를 닦고 버팀목을 놓고 그림자까지 묶어 세워 둔 게 보인다. 뿌리가 언 것들은 서서히 죽어갔지만, 되살아난 것들은 여전히 푸른빛이다. 희망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까?
페이스북에서 과거의 오늘이라며 갓 돌 지난 아이 사진을 다시 보여준다. 십오 년이 지난 이후를 비교해 보라고 한다. 반 뼘도 안 되던 아이 발이 지금은 260이다. 얼마 전에는 축구화가 작아져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축구화를 사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 똑같은 축구화인 줄 알았는데, 바닥 모양이 용도에 따라 다르게 생겼단다. 그래도 내심 그냥 신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낭독회 중에 톡이 와 있다.
“엄마, 제건 천연잔디용으로만 쓰는 건데요? 모양이 완전 다른데요.”
우겨보려고 했는데 챗GPT도 아이 편이다. 부상 위험이 있으니, 용도에 맞는 축구화를 사주란다.
“미안해. 새로 사자.”
사과를 하긴 했어도 나도 모르게 한탄이 흘러나왔다. 옛날엔 운동화 하나면 족했다. 운동화 신고 농구하면 농구화, 축구하면 축구화가 되던 때였다. 그에 비하면 요즘 세대는 참 유난이다 싶어 마음이 꽁해 있는데 문자가 왔다.
“제가 잘 말해주지 못해서 더 죄송해요. 다음엔 제대로 말씀드릴게요. 사랑해요.”
참 신기하다. 꽁한 마음이 순식간에 다 녹았다. 축구화뿐인가 농구화도 탁구화도 다 사주고 싶어졌다.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정말 까마득했는데 벌써 중학생이 되어 있다는 게 자신이 원하는 축구화가 있고, 엄마에게 따질 줄도 알고 반성할 줄도 안다는 게 내겐 희망처럼 보인다.
아이를 낳고 무섭고 떨려서 밤새 안절부절못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렇게 힘들었어도 지나간 일이 돼 있다는 게 희망차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일들을 이룩한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게 희망이 아니면 뭘까.
12월 29일엔 혜화역에 있는 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낭독회가 있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추모 시집 <보고 싶다는 말> 출간을 기념해 시인들과 유가족이 모여 추모 낭독회를 열었다. 유가족인 임의진 목사님은 책에 실리지 않은 자작시 ‘44번 셀터’를 낭독했다. 목사님이 절망 앞에서 제대로 절망함으로써 절망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며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라는 구절을 다시금 움켜쥐었다. 단어와 문장들이 손난로 같았다.
플리스 재킷 위에 패딩을 껴입으면서 겨울이 좋다고 생각했다. 추위를 유독 견디기 힘들어하는 내가 옷을 몇 겹씩 껴입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타서는 가방 앞주머니를 열어봤다. 깜박 놓고 온 줄 알았던 털장갑이 고스란하다. 한여름이 아니라 한겨울을 골라 새해가 밝아온다는 건 희망을 가르치기 위해서일까? 1월 1일은 희망을 이야기하게 하는 힘이 있다. 1월 1일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가방 속에서 털장갑을 발견하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