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수도권 일극주의’라는 거대한 중력장에 갇혀 있다. 인구, 자본, 인프라를 무섭게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버린 수도권 중심 체제 속에서, 지방의 생존을 위한 외침은 절박하다 못해 처절하다. 이러한 시점에 추진되는 ‘대구·경북(TK) 통합 신공항’은 단순히 소음 피해가 있는 군 공항을 외곽으로 이전하고, 민항 터미널을 조금 더 크게 짓는 차원의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무너진 국토 균형 발전의 축을 다시 세우고, 영남권 전체에 새로운 경제 심장을 이식하는 거대한 ‘게임 체인저’여야 한다.최근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기본계획이 고시됐다. 수많은 관계 기관과 담당자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큰 산을 하나 넘은 셈이다. 공항 운영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 공항 건설이라는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항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운영 전략(Operation Strategy)’, 즉 소프트웨어다. 우리는 지금 막연한 장밋빛 청사진보다는 냉철한 운영 콘셉트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성공적인 신공항 건설과 운영을 위해서 우리는 유럽의 항공 강국, 독일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유럽 대륙의 여객 허브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FRA)과 불과 160㎞ 떨어져 있음에도 독자적인 물류 허브로 성공한 쾰른-본 공항(CGN)의 전략적 포지셔닝은 TK 신공항에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공항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배후 수요(Catchment Area)’의 확보에 있다. 냉정하게 진단했을 때, 현재 대구·경북의 인구만으로는 국제공항 운영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렵다. 신공항이 자생력을 갖추려면 대구·경북을 넘어 수도권 동남부, 울산, 경남, 나아가 충청권 일부까지 아우르는 1000만 명 이상의 배후 수요를 기필코 확보해야 한다. 이를 해결할 유일하고도 강력한 해법은 ‘철도와 항공의 완벽한 물리적 결합’, 즉 인터모달(Intermodal·복합수송) 시스템의 구축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세계적인 허브가 된 비결은 공항 터미널 지하에 고속열차(ICE) 역사가 있어, 독일 전역에서 승객을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TK 신공항 역시 신공항 철도를 단순히 대구 도심과 공항을 잇는 셔틀 수준으로 설계해서는 안 된다. 서울 청량리에서 TK 신공항까지 1시간 이내에 주파하고, 중앙선, 경부선, 대구권 광역철도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영남권 어디서든 30분 이내에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 도달할 수 있는 ‘광역 철도망의 허브’가 돼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철도 역사의 위치다. 현재 계획된 공항 외곽의 군위역이 아니라, 활주로와 터미널 지하 직하부에 ‘신공항역’을 건설해야 한다. 승객이 무거운 짐을 들고 셔틀버스로 환승해야 하는 순간, 공항의 경쟁력은 절반으로 떨어진다. 철도가 활주로 아래로 들어와 항공과 원스톱으로 연결될 때, TK 신공항은 비로소 지역 공항의 한계를 벗어나 ‘동남권의 관문’이자 ‘한반도 내륙의 허브’로 격상될 수 있다.
여객 수송 전략에 이어서 물류와 산업 연계 전략은 쾰른-본 공항이 완벽한 참고서가 돼준다. 프랑크푸르트라는 거대 공항 인근에서 쾰른-본 공항이 독자적인 생존 영역을 구축한 비결은 바로 ‘화물 특화’였다. 현대 물류, 그중에서도 항공 물류에서 시간은 곧 비용이다. 대부분의 도심 인접 공항이 소음 문제로 야간 운항을 엄격히 통제할 때, 쾰른-본 공항은 24시간에 가까운 운영으로 고객을 끌어들였다. 이는 글로벌 물류기업들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UPS가 이곳을 유럽 허브로 선택했고, 페덱스(FedEx)와 DHL의 핵심 거점이 됐다. 밤사이 도착한 화물이 새벽에 분류되어 아침이면 유럽 전역으로 배송되는 시스템, 이것이 바로 TK 신공항이 지향해야 할 모델이다.
이러한 물류 중심 모델은 대구·경북의 산업 구조와도 직결된다. 구미의 모바일·반도체, 포항의 2차전지, 울산의 자동차 부품은 모두 무게 대비 가격이 비싸고 납기가 생명인 ‘항공 물류 친화적’ 산업들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 기업은 막대한 물류비와 시간을 허비하며 인천공항까지 육상으로 화물을 나르고 있다. TK 신공항은 3.5㎞급의 충분한 활주로를 확보해 대형 화물기가 언제든 뜨고 내릴 수 있게 하고, 실시간 통관 시스템과 공항 자유무역지역 내 첨단 스마트 물류 단지를 구축해야 한다. “TK 신공항을 이용하면 인천보다 통관이 빠르고, 물류비는 30% 저렴하다”는 확실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글로벌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결국 TK 신공항은 ‘여객과 물류의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하는 하이브리드 공항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객 부문에서는 무리하게 장거리 국적기를 고집하기보다, LCC(저비용항공사)를 기반으로 아시아·태평양 노선을 촘촘하게 장악하는 ‘실리적 허브’ 전략이 유효하다. 반면, 물류 부문에서는 파격적인 혜택으로 경쟁해야 한다. 토지 임대료 없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세계적인 물류 앵커 기업(Anchor Tenant)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장거리 화물 노선을 확보하여 지역 수출 기업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
나아가 공항 주변 개발은 단순히 아파트를 짓는 에어시티(Air City)가 돼서는 안 된다. 항공 물류와 직결된 바이오, 콜드체인(Cold Chain·신선 식품 물류), 항공 정비(MRO) 클러스터를 조성해 공항 자체가 도시의 기능을 하고 지역 산업을 견인하는 거대한 엔진이 되어야 한다. 쾰른-본 공항 주변이 물류 기업의 전진 기지가 된 것처럼, 의성·군위 지역은 첨단 산업의 전초 기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구·경북의 하늘길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경제지도를 그리는 핵심이다. 과거 경부고속도로가 대한민국 산업화의 혈관이었다면, 21세기 지방의 생존은 하늘길에 달려 있다.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은 수도권에 대항하는 지방의 반란이 아니다. 멈춰가는 대한민국 경제 엔진 옆에 또 하나의 강력한 터보 엔진을 장착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다. 프랑크푸르트가 보여준 ‘초광역 연결(Interconnectivity)’의 힘, 그리고 쾰른-본이 증명한 ‘물류 시간(Time-Value)’의 가치. 이 두 가지를 우리 실정에 맞게 융합한다면, TK 신공항은 내륙 분지의 한계를 넘어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로, 나아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열린 경제 영토’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항 건설을 위한 벽돌 한 장보다, 이 공항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하고 원대한 비전과 전략이다. TK 신공항이 쏘아 올릴 비행기가 단순히 여객을 싣는 것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희망, 그리고 균형 잡힌 대한민국의 미래를 싣고 날아오르기를 기대한다.
이호진 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직무대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