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살과 5살 자녀를 키우는 30대 직장인 박모 씨는 지난 주말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를 들렀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달라고 졸랐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캐릭터 상품을 사러 갔지만 정작 매대에서는 관련 제품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아이들이 케데헌을 좋아해서 선물로 사줄까 했는데 마땅한 장난감이 없었다. 온라인에서도 찾아봤지만 대부분 모조품이거나 배송 기간이 오래 걸리는 해외 직구 제품뿐이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데헌이 대표 인기 지식재산권(IP)으로 자리 잡았지만 국내 완구 산업은 이 같은 흐름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하고 있다. 식품·패션기업이 재빨리 관련 협업(컬래버레이션) 상품 등을 선보이며 특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완구는 작품 세계관이나 캐릭터 외형을 구현하기 쉬어 IP 협업 효과가 가장 크고 직접적인 산업이지만, 국내 기업의 제작 ·마케팅 역량 부족으로 인해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케데헌 특수 못 누리는 국내 완구업체
1일 업계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연시는 어린이날과 함께 완구업계 최대 성수기로 꼽힌다. 자녀, 조카 등을 위한 선물 수요가 단기간에 집중돼 이 시기 완구 매출은 평소보다 1.5~2배가량 늘어나곤 한다.어린이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 중 하나는 단연 ‘케데헌’이었다. 지난 6월 공개된 이후 전 세계 41개국에서 시청 1위를 차지하며 각국 어린이 시청층을 빠르게 흡수했다. 이 같은 열풍은 연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달 초 기준 작품의 누적 시청 수는 5억뷰를 넘어섰는데 이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중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이다. 최근 서울 성수동, 용인 에버랜드 등에서 열린 케데헌 팝업스토어(팝업)에도 2030세대 소비자뿐 아니라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인기를 입증했다.
하지만 정작 어린이가 주 소비층인 완구업계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다. 케데헌 캐릭터를 활용한 변신 로봇이나 요리세트, 부엌놀이 세트 등 관련 장난감이 있을 법하지만 실제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곳은 손에 꼽는다. 최근 완구 전문 유통기업 가이아코퍼레이션이 글로벌 피규어 브랜드 펀코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 POP!’ 시리즈를 정식 출시한 정도가 유일하다.
반면 국내 식품·패션업계는 일찍이 넷플릭스와 IP 협업을 맺고 관련 제품을 내놓으며 초기 수요를 공략했다. 농심은 지난 8월부터 넷플릭스와 손잡고 신라면, 새우깡 등 제품 패키지에 작품 캐릭터가 새겨진 상품을 선보였다. 파리바게뜨도 작품 세계관과 접목한 베이커리 제품을 출시했다. 삼성물산의 SPA(제조직매형 의류) 브랜드 에잇세컨즈 역시 작품 속 걸그룹 ‘헌트릭스’와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에서 영감을 얻은 의류를 판매하며 ‘케데헌 특수’를 톡톡하게 봤다.
자금력·마케팅 역량 등 글로벌 경쟁서 밀려
업계에선 국내 완구사들이 이 같은 기회를 잡지 못한 데는 글로벌 경쟁력 부재가 자리한다고 입을 모은다. 인기 IP를 선점하거나 미디어 콘텐츠 기업과 협력해 제품을 기획하는 마케팅 역량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다.특히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은 대량 생산과 품질 관리, 글로벌 유통망을 두루 갖춘 업체와의 협업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영세한 중소업체가 대부분인 국내 완구사들은 협업 대상에서 밀린다는 분석이다. 실제 넷플릭스는 지난 10월 글로벌 장난감 제조업체 마텔·해즈브로 등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작품 관련 완구를 판매한다고 알렸다. 이들 기업에서 생산한 제품은 이날부터 아마존·월마트 등에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이병우 한국완구협회장은 “중소업체가 대부분인 국내 주요 완구사들 입장에서는 케데헌 같은 신규 IP가 실제로 얼마나 팔릴지에 대한 검증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선뜻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이미 수요가 형성된 '뽀로로'나 '콩순이', '미미' 등 기존 캐릭터 중심으로 안정적 사업을 이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기업 규모가 작다보니 협업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회장은 “뽀로로 등 국내 캐릭터의 로열티가 통상 제품 출고가의 10% 수준인 반면 산리오, 디즈니 등 해외 기반 IP는 이보다 높은 비용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며 “글로벌 완구업체에 비해 자금이나 마케팅 역량이 부족한 국내 업체들은 이러한 조건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적자 빠져…침체기에 갇힌 완구산업
국내 완구 시장은 한때 세계 3위 수준의 수출 대국으로 꼽힐 만큼 경쟁력을 갖췄지만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40년 가까이 침제기에 직면해 있다. 저출생 영향으로 내수 시장이 축소된 데다가 생산 비용이 증가하면서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이 늘었다. 이후 수입 완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산업 구조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다.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완구 수출액은 1695만6000달러에 그친 반면, 수입액은 2억3903만7000달러로 집계됐다. 무역수지는 2억2208만1000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업계는 글로벌 콘텐츠 흥행이 반복될수록 국내 완구 산업의 구조적 한계가 더욱 선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에 단순히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기술력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한 산업 전반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글로벌 완구기업들은 이미 인공지능(AI)을 적용한 제품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실제 마텔은 지난 6월 오픈AI와 협력해 장난감에 AI를 접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완구 산업도 해외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 사업을 활용한 기술 개발과 함께 혁신적인 제품 기획과 마케팅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은 “최근 정부가 강조하는 AI 기조에 발맞춰 완구 산업도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완구에 AI 기술을 접목한 이른바 ‘스마트 토이’ 개발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