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테크놀로지스 창업주인 마이클 델과 그의 부인 수잰 델은 이달 초 ‘트럼프 계좌’로 불리는 어린이 재산 증식 프로그램에 62억5000만달러(약 8조9500억원)를 기부했다. 10세 미만인 아동 2500만 명에게 250달러씩 나눠줬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개인 직접 기부였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정부 정책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염치가 더 큰 화제가 됐다.트럼프 계좌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의 일환으로 도입돼 내년부터 시행되는 증시 부양책이다. 증시 장기 투자를 조건으로 증여세를 면제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대상은 올해부터 2028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 시민이다. 연방정부가 계좌 개설 시점에 1000달러(약 143만원)를 지원하고, 후원자 한 사람이 연간 5000달러(약 716만원)까지 신고와 세금 없이 계좌에 돈을 넣을 수 있다. 부모와 조부모 등 4명이 증여에 참여하면 한 해에 최대 2만달러(약 2870만원)의 재원이 마련된다. 이렇게 모인 자금 중 70%는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인덱스펀드에 의무적으로 투자된다. 현지 전문가들은 트럼프 계좌가 도입되면 향후 10년간 2000억달러(약 289조원)의 자금이 미국 증시에 유입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정책의 효과는 증시 활성화만이 아니다. 청년이 사회에 진출할 때 버팀목 역할을 할 자금이 생기는 만큼 미래 복지 지출을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자산가에게 기부받기 쉽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델 부부 외에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 창업자 레이 달리오(7500만달러) 등이 트럼프 계좌를 통한 기부에 동참했다.
한국은 미성년자 증여가 힘든 나라다. 10년 기준 증여세 비과세 한도가 2000만원(연 200만원)으로 제한돼 부모와 조부모, 친인척이 재산을 넘기는 게 쉽지 않다. 뭉칫돈을 물려줬다가는 증여액의 최대 절반을 세금으로 떼인다. 고율의 세금을 감내하고 미성년자 자녀에게 증여한 자금은 해외 증시로 빠져나가는 게 보통이다. 국내 주식시장에 장기간 투자할 유인이 없어서다.
국내에서도 미성년자 증여세 감면 논의가 몇 차례 이뤄졌지만 ‘부자 감세’ 프레임에 번번이 막혔다.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우려를 고려하더라도 한국의 면세 한도는 지나치게 빡빡하다. 미국은 트럼프 계좌와 별도로 연간 1만8000달러(약 2580만원)를 세금 없이 자녀에게 증여할 수 있다. 증여세를 많이 떼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면세 한도 역시 한국의 다섯 배 수준인 연 110만엔(약 1000만원)에 달한다. 교육비 지원 목적의 증여에는 별도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활발한 부의 이전이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게 주요국의 공통된 판단이다.
최근 정부는 해외 주식을 판 돈으로 국내 주식을 사서 1년 이상 보유하면 양도세 중 일부를 면제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국내 자산의 해외 유출을 줄여 원화 가치를 방어하고 증시도 부양하겠다는 취지다. 시장에선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다. 절세 계좌에 넣을 수 있는 한도액이 5000만원에 불과해서다. 기껏해야 수백만원 수준인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리겠다고 해외 자산을 정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는 지적이다.
우리도 미국처럼 미성년자 증여 활성화와 국내 주식 장기 투자를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만하다. 국내 증시에 조 단위 장기 자금이 들어오고, 청년의 미래 경제 여건이 개선되는 등 기대되는 효과가 한둘이 아니다. 부의 쏠림에 대한 우려는 저소득층 자녀에게 정부 지원을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완화할 수 있다. 이제 한국도 ‘증여세 감면=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