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한 중년 남성이, 긴 여정의 끝에 대기업 부장이 아닌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드라마 속 등장 인물인 백정태 상무는 팀의 방향을 제시하고 구성원의 기여를 인정하며 안전한 소통 환경을 만드는 리더의 본질적인 역할을 상실한 채, 위에서 받은 압박을 아래로 그대로 재현하는 ‘전달자 리더’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그는 회의에서 김 부장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으며 말을 끊거나 건성으로 반응하고, 아이디어의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지만 반복적인 무시’는 김 부장의 발언 의지를 서서히 약화시킨다. 특히 김 부장이 준비해온 보고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건 윗 선에서 이미 정리된 거야”라고 단정 지으며 논의를 차단하는 장면은, 구성원이 얼마나 쉽게 자기 검열(Self-Censorship)로 빠져들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환경에서 김 부장은 점차 자신의 역할 의미를 잃고 소진되며, 김 부장의 팀 또한 방향성을 잃어간다.
많은 리더는 직원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수동적인 성향이나 낮은 적극성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조직 행동 연구에서는 직원의 침묵을 적극성 부족이 아난 환경에 대한 방어 반응으로 말한다. 이를 야기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마이크로 어그레션(Micro-Aggression)’이다. 마이크로 어그레션은 명시적·의도적 폭력과는 다르다. 그것은 ‘의견을 듣지 않는 태도’, ‘말을 끊는 습관’, ‘기여를 축소하는 표현’, ‘존재를 투명하게 취급하는 시선’과 같은 작고 무심한 상호작용이다. 이 미세한 행동이 누적될수록 직원의 자존감, 동기, 기여 의지는 계속해서 감소하게 된다.
<i># 마이크로 어그레션은 ‘구조적 침식’을 야기한다</i>
마이크로 어그레션을 개인의 감정 문제로 치부하기 쉽지만, 마이크로 어그레션은 조직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전미 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반복적인 미세 무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i>1. 역할 정체성(Role Identity) 손상: </i>직원은 더 이상 자신의 전문성이 조직에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i>2.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i>팀의 일원보다 스스로 주변부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i>3. 인지적 자원 소모(Cognitive Load): </i>“왜 나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반복적으로 해석하며 집중력이 저하된다.
<i>4. 의견 제시 위축(Voice Silence): </i>연구에 따르면 의견이 세 번 연속 묵살된 직원은 이후 평균 45% 의견 제시가 감소한다. 이처럼 마이크로 어그레션의 축적은 결국 ‘조용한 팀원’, ‘기여하지 않는 구성원’을 만들어 낸다. 조직의 상호작용 방식이 직원의 목소리를 빼앗은 것이다.
<i># 회의에서의 작은 행동이 팀 전체의 혁신 역량을 결정한다</i>
회의는 마이크로 어그레션이 가장 흔하게 발생되는 지점이다. 말을 끊는 행동, 특정 직원만 반복적으로 발언하도록 지목, 부정적 평가는 길고 긍정적 피드백은 짧은 패턴, 질문을 ‘반박’으로만 해석하는 분위기 같은 행동은 팀의 ‘발언 생태계’를 파괴한다. 아이디어 회의는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이 아닌 ‘비판을 피하기 위한 지뢰밭’으로 변모하며 혁신은 죽어간다. 혁신이란 좋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잘못된 의견을 말해도 안전한 환경’에서 시작된다.
<i># 침묵은 비난 회피 전략이다</i>
많은 리더는 침묵을 참여 의지 부족이라 해석하지만 대부분의 침묵은 비난 회피 전략(Blame Avoidance Strategy)에 가깝다. 직원은 다음과 같은 흐름을 따른다.
<i>의견 제시 → 무시 또는 부정적 피드백 경험 → 자기 의심 → 기여 회피 → 침묵 → 심리적 이탈</i>
이 과정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이다. 앞서 드라마에서 김 부장이 점점 조직에서 자신의 색을 잃어갔던 과정도 바로 비난 회피 경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i># 마이크로 어그레션 완화를 위한 4가지 행동</i>
<i>1. 발언권의 구조를 설계하라: </i>회의는 어쩔 수 없이 공정한 발언 시간이 주어지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참가자가 동일한 시간 동안 발언하거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번갈아 갖는 ‘라운드 로빈’ 방식이나 사전 템플릿 준비 등을 적용해 구조적으로 발언권의 형평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i>2. 공로를 ‘즉시’ ‘구체적으로’ 인정하라: </i>막연한 칭찬보다 "방금 말한 포인트가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해줬어요"와 같은 기여 기반 피드백이 보다 효과적이다.
<i>3. 침묵은 능력 문제가 아닌 ‘경험의 결과’로 해석하라: </i>침묵은 ‘하고 싶지 않음’이 아닌 ‘위험의 회피’이다. 침묵이 생긴 지점에서 리더는 반드시 먼저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i>4. 리더 본인의 미세 행동을 점검하라: </i>무심하게 말 끊기, 편향적 피드백, 시선 처리 등 리더의 작은 행동 하나가 조직 문화를 결정한다.
마이크로 어그레션은 작지만 누적되었을 때에는 조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팀의 동기, 혁신 역량, 소속감, 참여 의지 모두 서서히 약화시킨다. 조직 내에서 직원들은 거대한 폭력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 보다, 작은 무시에 의한 침묵이 축적되며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빈번하다. 리더는 항상 침묵의 배경을 탐지하고, 팀의 목소리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유대영 휴넷리더십센터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