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면 1초 만에 지혈"…KAIST가 개발한 의료 기술의 정체

전장에서 총탄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과다출혈’이다. 총상이든 파편상이든 피를 제때 멈추지 못하면 생존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전장의 냉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겨냥한 기술이 KAIST에서 나왔다.

스티브 박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와 전상용 생명과학과 교수가 이끄는 공동연구팀은 상처에 뿌리는 순간 약 1초 만에 출혈을 차단하는 파우더형 차세대 지혈제를 개발했다고 29일 밝혔다. 붕대를 감거나 패치를 붙일 시간조차 없는 전투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즉각 지혈’ 기술이다. 이 연구에는 현역 육군 소령이 참여해 실험실이 아닌 실제 전장과 재난 현장을 기준으로 기술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기존 지혈제는 대부분 패치 형태다. 평평한 구조 탓에 깊고 불규칙한 상처에는 밀착이 어렵고 고온·고습 환경에서는 성능 저하와 보관 문제가 뒤따랐다. 연구팀은 이런 한계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어떤 형태의 상처에도 뿌리기만 하면 적용되는 ‘파우더’ 방식으로 개발해 하나의 제형이 다양한 출혈 상황을 감당하도록 설계했다.

핵심은 혈액 속 이온 반응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AGCL 파우더’는 알지네이트와 겔란검, 키토산 등 생체적합 천연 물질을 결합한 구조로 혈액 속 칼슘 같은 양이온과 만나면 1초 이내에 겔로 변한다. 겔은 상처 표면을 덮는 수준을 넘어 깊숙한 부위까지 스며들어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지혈을 동시에 구현한다.

지혈제의 성능은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파우더는 자체 무게의 7배가 넘는 혈액을 흡수하고 40kPa 이상의 압력에도 버틸 만큼 강하게 상처를 밀봉한다. 고압·대량 출혈 상황에서도 혈류를 빠르게 차단해, 기존 상용 지혈제보다 월등한 밀폐력을 보였다.

안전성 역시 전투 기준을 충족한다. 혈액과 접촉해도 용혈률은 3% 미만, 세포 생존율은 99% 이상이다. 항균 효과는 99.9%에 달했고 동물실험에서는 빠른 상처 회복과 혈관·콜라겐 재생 촉진 효과가 확인됐다. 실제 간 손상 수술 모델에서도 출혈량과 지혈 시간이 크게 줄었고 2주 후 간 기능은 정상 수준으로 회복됐다. 전신 독성도 관찰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지혈제는 ‘현장형’이다. 실온과 고습 환경에서도 2년간 성능이 유지돼 냉장 보관이 어려운 전투 지역이나 재난 현장에서도 즉시 사용할 수 있다. 군 의료 키트는 물론 구조대와 응급의료 현장에 그대로 투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국방을 위해 출발한 기술이지만 활용 범위는 전장을 훌쩍 넘어선다. 재난 지역,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개발도상국, 나아가 체내 수술 지혈까지 적용 가능해 국방과학기술이 민간 의료로 확장되는 대표적 ‘스핀오프’ 사례로 평가된다. 컴퓨터와 GPS처럼 전쟁을 위해 태어난 기술이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진화한 사례다.

연구에 참여한 박규순 KAIST 박사과정생(육군 소령)은 “현대전의 핵심은 인명 손실을 얼마나 줄이느냐”라며 “군인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연구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이영애 기자 0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