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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금융의 핵심 지역 중 하나인 유로존의 채권 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1999년 유로화 출범 이후 금융 시장을 지배해 온 독일과 프랑스 등 핵심 국가와 남유럽의 주변국의 국가 신용 위계질서가 변화면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뼈를 깎는 구조개혁으로 16년 만에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신용등급 강등의 수모를 겪었고 내년 예산안 합의에 실패했다.
엇갈린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채 금리
30일 로이터통신과 트레이드웹에 따르면 지난 9월 18일 장중 프랑스 10년물 국채 금리와 이탈리아 10년물 국채 금리가 약 3.48%~3.56% 구간에서 만났다. 양국 국채의 금리 차이, 즉 스프레드가 ‘0bp(베이시스 포인트)’를 기록한 것이다.보통 국채 금리는 그 나라의 부도 위험을 반영한다.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더블 A(AA)’ 이상의 초우량 신용등급을 유지해 온 유로존의 핵심 국가였다. 반면 이탈리아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정치 불안으로 ‘트리플 B(BBB)’ 등급을 오갔다. 5년 전인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만 해도 양국의 금리 차이는 최대 200bp(2%포인트)에 달했다.
그러나 시장은 프랑스의 정치적 마비 리스크와 이탈리아의 부채 리스크를 ‘동급’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26년간 유지된 유로존의 신용 카르텔이 무너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지난 29일 기존 독일 국채 대비 프랑스 국채의 스프레드는 약 76~80bp 수준에서 굳어졌다. 이는 유로존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이후 가장 높은 범위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국채를 보유하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투자자의 생각이 시장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 반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독일과 스프레드를 각각 69bp, 43bp 수준까지 좁히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6~1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프랑스 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몬 계기는 내부의 정치적 문제였다는 분석이다. 최근 프랑스 의회는 정파 간의 극심한 대립 끝에 결국 2026년 본예산안 합의에 실패했다. 미셸 바르니에 전 총리 내각과 바이루 전 총리 내각 모두 불신임으로 붕괴했고, 급히 등판한 세바스티앙 르코르뉴 총리 내각마저 의회 과반 확보에 난항을 겪으면서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정치 시스템은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국가 기능의 마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긴급 예산 롤오버 법안'을 통과시켰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 조치는 프랑스 헌법 제47조 및 유기적 예산법 제45조에 근거한 것이다. 2026년 본예산이 확정될 때까지 정부 지출을 전년 수준으로 동결하고 최소한의 세금 징수 권한만 유지하는 것이 골자다.
이런 정치적 난맥상은 재정 성적표로 이어졌다. 올해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4%로 추산된다. 유로존 안정성장협약(SGP) 기준인 3%를 두 배 가까이 상회하는 수치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9월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강등했다. 프랑스가 주요 신용평가사로부터 ‘더블 A’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 금융 시스템 '흔들'
프랑스 국채 위기는 단순히 정부가 부담해야 할 이자 비용이 늘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유로존 금융 시스템의 혈관인 레포(Repo·환매조건부채권) 시장과 파생상품 시장의 담보 가치도 훼손할 수 있다.프랑스 국채는 발행 잔액만 3조 4160억 유로에 달하는 유로존 최대의 단일 담보 자산이다. 독일 국채는 발행 물량이 적어 품귀 현상을 빚는다. 반면 프랑스 국채는 풍부한 유동성과 높은 신용도를 바탕으로 유럽의 은행과 보험사, 연기금들이 현금을 빌릴 때 가장 선호하는 담보로 쓰여왔다. 그러나 이 ‘최상급 담보’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금융권 전체에 유동성 경색 경보가 켜졌다.

프랑스 산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예산 롤오버’ 사태로 정부 발주 사업이 전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던 친환경 에너지 전환 인프라 사업과 파리 광역 급행 철도만 확장 등 대형 국책 사업의 자금 집행이 무기한 지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우크라이나 지원과 자체 국방력 강화를 위해 내년 국방비 대폭 증액을 계획했던 다소 항공, 탈레스 등 프랑스 방산 기업들은 예산 동결로 인한 ‘수주 절벽’에 직면할 수 있다.
프랑스 재무부 산하 국채관리청(AFT)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 정부가 시장에서 조달해야 할 자금 규모(순 발행+상환)는 3100억 유로에 달한다. 정치적 마비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금리가 급등할 경우, 프랑스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금리까지 동반 상승하는 ‘구축 효과’가 발생해 민간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
‘PIGS’의 오명을 씻고
반면 이탈리아와 스페인 산업계는 부활했다. 2010년대 재정위기 당시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로 조롱받던 이들 국가는 이제 유로존의 성장을 견인하는 우등생이 됐다는 분석이다. ‘프랑스 엑소더스’ 자금이 남유럽 국채와 자산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기업들의 조달 금리가 낮아지고 투자가 활성화되는 선순환이 나타나고 있다.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스페인 중앙은행(BdE)은 올해 스페인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9%로 상향 조정했다. 유로존 평균 성장률 전망치(약 0.8~1.0%)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스페인이 2년 연속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관광 산업의 호조와 EU의 경제회복기금(NGEU)이 디지털·친환경 제조업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면서 스페인 기업들의 펀더멘털이 강화됐다.
국제신용평가사 S&P는 지난 9월 스페인의 신용등급을 ‘A+’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26일 기준 스페인 국채 10년물 금리는 3.10% 수준에서 안정되면서 스페인 기업들은 프랑스 경쟁사보다 더 싼 이자로 자금을 빌려 설비를 증설하고 고용을 늘리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조르자 멜라니 총리의 안정적인 리더십 아래 재정 건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로이터에 이탈리아 상원은 찬성 113표 대 반대 70표로 2026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이 예산안은 재정적자 목표치를 2025년 3.0%에서 2026년 2.8%로 낮추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2025년 적자 추정치(5.4%)와 대조되는 수치다. 만성 적자국이었던 이탈리아가 프랑스보다 더 건전한 재정 상태를 달성하게 됐다.

미카엘 니자르 에드몽드 로칠드 자산운용 멀티에셋 책임자는 "남유럽 국가들은 구조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통해 투자자들의 신뢰를 되찾았다"며 "반면 프랑스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준 주변국’ 취급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시장의 극단적인 ‘프랑스 매도-남유럽 매수’ 현상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의 국채 금리 스프레드 축소가 남유럽의 펀더멘털 개선보다는 독일의 국채 발행 증가에 따른 이른바 ‘분모 효과’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스프레드는 상대적인 값이다. 분모인 독일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스프레드는 자연스럽게 축소된다. 실제로 독일 정부는 최근 경기 부양을 위해 헌법상의 ‘부채 브레이크’ 규정을 완화하고, 5000억 유로 규모의 인프라 펀드를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독일 국채 발행 물량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로 지난 4일 기준 독일 10년물 금리는 2.76%까지 상승했다.
제프리스의 모히트 쿠마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탈리아 스프레드 축소의 상당 부분은 이탈리아가 잘해서가 아니라, 독일 금리가 올랐기 때문에 발생한 기술적 현상"이라며 "독일 역시 예전만큼 압도적인 안전자산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남유럽 부채는 여전히 문제
남유럽의 구조적 부채 문제도 여전히 뇌관이라는 지적이다. 유럽연합(EU) 통계기관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기준 정부 부채 비율은 이탈리아는 GDP 대비 138.3%로 여전히 유로존 내에서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스페인 역시 103.4%로 100%를 상회한다. 프랑스(115.8%)보다 높은 부채 비율은 언제든 다시 재정 위기의 불씨가 될 수 있다.알프레드 카머 MF 유럽국장은 "EU에는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보유할 만한 대형 안전자산이 충분치 않다"며 "독일마저 재정 지출을 늘리는 상황에서 유로존 전체를 아우르는 안전자산의 부재가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로존 전체의 신용 등급이 ‘싱글 A’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됐다. 과거 ‘AAA(독일) - AA(프랑스) - BBB(이탈리아)’로 명확히 나뉘었던 차이가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A+’에서 ‘A-’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만나는 구조로 재편됐다.

로이터의 칼럼니스트 마이크 돌란은 "유로존 GDP 가중 평균 신용등급이 이제 ‘높은 싱글 A’ 수준으로 수렴하고 있다"며 "이는 유로존 전체가 ‘중위험 중수익’ 지역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하며, 글로벌 안전자산으로서 유로화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고 진단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 셈법도 복잡해졌다. 프랑스 국채 금리가 계속 치솟을 경우 ECB가 2022년 도입한 ‘전달보호수단(TPI)’을 가동해야 할지 논란이 될 수 있다. TPI는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금리가 급등하는 국가의 국채를 ECB가 매입해 주는 제도다. 하지만 프랑스의 위기는 ‘펀더멘털(재정 적자)’과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ECB가 개입할 명분이 약하다. 섣불리 개입했다간 '방만한 재정 운용을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막아준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유로존의 변화는 한국의 투자자와 정책 당국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로존 국채, 특히 프랑스 국채에 대한 노출이 높은 국가 중 하나다. 로이터에 따르면 프랑스 국채의 비거주자(외국인) 보유 비중은 약 50%에 달한다. 한국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 등 아시아계 자금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한국 기관투자자들은 전통적으로 독일 국채보다 금리는 높으면서도 부도 위험은 거의 없는 ‘가성비 좋은 안전자산’으로 프랑스 국채를 선호해왔다.

그러나 프랑스 신용등급 강등과 가격 하락은 국내 기관들의 평가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환 헤지 비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자산 가치까지 하락하면, 한국 기관들이 프랑스 채권을 매도하고 미 국채나 다른 자산으로 갈아타는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국내 증권사들이 발행한 유로스탁스50(EuroStoxx50) 지수 연계 ELS(주가연계증권) 상품도 영향권이다. 프랑스 기업들은 유로스탁스50 지수에서 큰 비중(LVMH, 토탈에너지사, 사노피 등)을 차지한다. 프랑스 재정 위기가 실물 경제로 전이돼 프랑스 우량주들의 주가가 하락할 경우 국내 ELS 투자자들의 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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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