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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의 경계 허문 新여성 연기…로맨틱코미디 문법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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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의 경계 허문 新여성 연기…로맨틱코미디 문법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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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앤 키튼(1946.1.5~2025.10.11)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다고 하자"
    금발을 덮은 중절모, 헐렁한 슈트에 넥타이 차림. 지난 10월 79세의 일기로 별세한 다이앤 키튼은 시대가 규정한 고전적 미인의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우아한 파격은 할리우드를 이끄는 하나의 스타일로 남았다. 성별의 경계를 허문 그의 자유로운 미학은 ‘젠더리스’ 패션의 원형이었다.

    키튼은 1970년대 ‘아메리칸 스위트하트’의 대명사였다. 그 절정은 우디 앨런과 만들어 낸 ‘애니 홀’(1977)이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미모의 뉴요커 애니 홀로 연기한 그는 로맨틱코미디의 문법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딘가 서투르면서도 사랑받는 것을 목적으로 살지 않는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그는 이 작품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타 반열에 오른다.


    키튼은 늘 과잉을 경계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에서 마이클 콜레오네의 연인이자 아내 케이 애덤스로 나선 그는 알 파치노와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들을 만든다. 마피아 세계에 있으면서도 끝내 그 질서에 감정을 내맡기지 않는 인물을 절제된 연기로 구현한 그는 남성 서사의 주변부에 머무는 여성 역할조차도 이야기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우디 앨런, 알 파치노와 연애했지만 키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은 넘쳤다. 딸과 아들을 입양해 키웠다.

    로버트 레드퍼드(1936.8.18~2025.9.16)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위험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1974년 나온 마블 코믹스 ‘어벤져스’에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얼굴을 드러낸 채 자동차 지붕 위를 뛰어넘자 한 행인이 “로버트 레드퍼드 아니야?”라고 중얼거린다. 농담처럼 던진 이 한 컷의 대사에서 레드퍼드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다. 할리우드를 넘어 미국인이 상상한 이상적인 남성. 공교롭게도 이후 금발의 남성 슈퍼히어로는 예외 없이 그의 얼굴을 닮아간다.


    유럽에 알랭 들롱이 있었다면 미국엔 ‘뉴 할리우드 시네마’를 대표하는 레드퍼드가 있었다. 지난 9월 별세한 레드퍼드는 할리우드 황금기 이후 등장한 가장 상징적인 배우였다.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선댄스 키드부터 ‘스팅’(1973), ‘대통령의 음모’(1976)까지 베트남전쟁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 워터게이트 이후 낙관과 회의가 교차하던 미국 사회의 정서를 대변하는 얼굴이 됐다.

    레드퍼드는 스타로만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을 가장 집요하게 의심한 영화인이었다. 그의 전환점은 배우 이후부터다. ‘보통 사람들’(1980)로 감독에 데뷔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 그는 1985년 선댄스재단을 출범시키고 영화제를 시작하면서 상업 시스템 밖에서 독립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 40년이 지나 선댄스영화제는 세계 최대 독립영화 플랫폼으로 무명의 감독과 배우를 발굴하는 등용문으로 기능하고 있다.
    김지미(1940.7.15~2025.12.7)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1950년대 영화계에 발을 들인 김지미(본명 김명자)는 한국 영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1950년대와 황금기였던 1960년대, 암흑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충무로를 빛낸 유일무이한 배우였다. 열여덟 살에 출연한 데뷔작 ‘황혼열차’(1957)부터 ‘하숙생’(1966), ‘토지’(1974), ‘명자 아끼꼬 쏘냐’(1992)까지 스크린에 걸린 거의 모든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공식 기록으로만 370여 편에 출연한 그는 “아마도 700편 이상 출연했고, 700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대 여성 배우에게 요구되던 순종적인 여인, 고결한 모성의 틀을 깬 연기로 주체적인 여성상을 정립했다. 그는 후배 여배우들에게 “열심히 노력해 일류가 돼야 한다. 그러면 좋은 배우로 칭호를 받고, 남자와 여자 구별도 없어진다”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영화제작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80년대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6) 같은 수작을 선보였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를 수입해 오는 남다른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롭 라이너(1947.3.6~2025.12.14)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고 각자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들어 낸 감독이다. 20세기 중반 영화감독과 작가, 배우로 활동한 칼 라이너의 아들인 그는 배우로 먼저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1970년대 시트콤 ‘올 인더 패밀리’에서 ‘미트헤드’ 역으로 얼굴을 알린 그는 카메라 뒤로 자리를 옮기며 진가를 드러냈다. 1986년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탠 바이 미’가 흥행했고,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에선 판타지와 유머, 낭만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는 로맨틱코미디의 문법을 새로 쓴 작품으로 남았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1990년대에도 뜨거웠다. ‘미저리’(1990)는 주연 배우 캐시 베이츠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만큼 호평받았고,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어 퓨 굿 맨’(1992)에서 나온 대사 “자넨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You can’t handle the truth!)”는 지금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대사로 통한다.


    연말에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아들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이 많은 영화 팬에게 안타까움을 더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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