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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에서 김병훈으로…뷰티 산업 ‘제조’의 시대가 가고 ‘콘셉트’의 시대가 왔다[2026 뉴리더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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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에서 김병훈으로…뷰티 산업 ‘제조’의 시대가 가고 ‘콘셉트’의 시대가 왔다[2026 뉴리더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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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2026 뉴 리더]
    서경배. 한국 뷰티 산업에서 이 이름만큼 견고한 성벽은 없었다. 서 회장이 이끄는 아모레퍼시픽을 필두로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은 브랜드 파워와 견고한 오프라인 유통망, 그리고 내수 시장의 압도적 점유율을 무기로 수십 년간 시장을 장악해 왔다. 우리가 아는 ‘K뷰티’라는 고유명사 역시 대기업 중심 산업에서 일궈낸 빛나는 성과였다.

    하지만 2025년 8월 대한민국 산업사에 기록될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에이피알(APR)이 국내 뷰티 업계 시가총액 1위에 오르며 수십 년간 K뷰티의 상징으로 군림해 온 아모레퍼시픽을 왕좌에서 밀어낸 것이다. 김병훈 에이피알 대표의 개인 주식 가치는 2024년 말과 올해 12월 19일 1년 새 386% 폭증하며 2조9000억원을 돌파, 서 회장(2조58억원)의 자산 규모를 넘어섰다.


    이는 단순히 주식시장의 숫자가 바뀐 사건이 아니다. 화장품 산업의 중심축이 ‘제조와 자본’에서 ‘콘셉트와 플랫폼’으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변화의 최전선에는 에이피알의 김병훈, 구다이글로벌의 천주혁, 더파운더즈의 이선형·이창주가 서 있다. 이들은 기존 화장품 가문의 후계자도, 정통 뷰티 대기업 출신의 엘리트도 아니다. 취업 대신 창업을, 연구소 대신 숫자(경영)를, 내수 대신 글로벌 온라인 영토를 택한 1980년대생 리더들이다.
    1980년대생 닫힌 문’ 대신 판’을 짠 세대
    현재 K뷰티를 재편하는 뉴 리더들의 가장 선명한 공통점은 1980년대생이라는 점이다. 김병훈 에이피알 대표(1988년생), 천주혁 구다이글로벌 대표(1987년생), 이선형·이창주 더파운더즈 공동대표(1988년생)는 모두 30대 후반의 경영자들이다.

    이들이 사회에 발을 내디딜 무렵 대한민국은 이미 ‘고성장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었다. 대기업 공채 문은 좁아졌고 평생직장의 신화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대기업에 들어가 시간을 쌓아도 상위 1%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한 세대. 안정적인 커리어보다 단숨에 판을 뒤집는 ‘텐배거(10배 수익)’가 조직 안이 아니라 밖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세대였다.


    김병훈 대표의 삶은 이러한 세대적 갈증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대기업의 사내 정치에 휘말려 실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능력이 우선되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결심과 함께 사업가의 길을 꿈꿨다. 창업을 목표로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2011년 미국 교환학생 시절 글로벌 시장의 가능성을 목격하며 사업 구상을 구체화했다.


    “저는 진짜 어린 시절부터 창업을 꿈꿨습니다. 정주영 회장님 같은 1세대 창업가들을 동경했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부모님 세대의 근면함을 존경했습니다. 스무 살, 창업을 하고 싶어 경영대에 입학했고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첫 창업팀을 꾸렸습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이들은 기성세대가 닦아놓은 길을 걷는 대신 스스로 새로운 영토를 설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이들은 기존 산업의 주류였던 화학과·화공과 출신이 아니다. 김병훈 대표(연세대 경영), 이선형·이창주 더파운더즈 공동대표(서울대 경제) 등 주역들의 면면을 보면 상경계열이 압도적이다. 이들은 화장품을 만들어야 하는 ‘화학적 물질’이 아니라 시장의 니즈를 ‘설계하고 유통하는 구조’로 바라봤다. 화장품 제조는 이미 한국화장품제조,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라는 세계적 수준의 OEM, ODM 인프라가 완성되어 있었다.



    ODM이란 한국 특유의 화장품 제조 환경은 진입장벽을 낮췄고 제조 경쟁력을 빠르게 평준화시켰다. 공장이 더 이상 차별화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서 경쟁의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기획과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시장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중소 인디 브랜드들이 가진 날카로운 콘셉트와 빠른 실행력은 기존 질서의 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진짜 승부처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콘셉트’에 있었다.

    더파운더즈의 출발도 이를 보여준다. 대학 동기인 두 리더는 경영자적 기획력을 앞세워 창업에 나섰다. 모바일 환경이 보편화되면서 큰 자본이 없어도 소비자들에게 쉽게 제품을 알리고 판매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는 판단이었다. 이선형 대표는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경제학을, 공동창업자는 인류학을 전공했다”며 “개발 역량보다는 기획을 날카롭게 다듬을 때 고객 가치를 더 크게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제조의 피크에서 피어난 ‘콘셉트 산업’의 혁명
    하지만 이들의 창업기가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중반 중국이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변신하면서 아모레퍼시픽은 ‘황제주’에 등극했고 대기업들은 중국 특수라는 거대 자본의 파티를 독식했다.


    에이피알이 설립된 2014년, 구다이글로벌이 탄생한 2016년, 더파운더즈가 등장한 2017년은 화장품 브랜드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중소 브랜드 간의 생존 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구다이글로벌의 천주혁 대표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2016년을 기점으로 중국 시장 경쟁이 과열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나 같은 창업자가 기회를 잡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기업의 자본력과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기존의 문법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더욱이 화장품 산업은 고도화된 ODM 인프라로 ‘제조업’에서 ‘콘셉트 산업’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다. 이들은 대기업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디지털 게릴라전’에 뛰어들었다.

    김병훈 대표는 이 지점을 가장 영리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정반대의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전통적 기업들이 연구개발 후 유통망을 확보했다면 김 대표는 SNS와 자사 몰(D2C)을 먼저 구축해 고객 데이터를 확보한 뒤 그들이 반응하는 콘셉트에 맞춰 제품을 소싱했다. 고객 리뷰에 민감하게 대응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랐다는 그의 집요함은 화장품을 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트래픽을 구매로 치환하는 행위’로 변모시켰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온라인 마케팅에는 국경이 없었다. 전 세계 뷰티 트렌드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동기화된다는 점을 포착한 에이피알은 현재 매출의 80%가 해외에서 나온다. 미국 단일 국가에서만 분기 매출 1500억원을 돌파하며 ‘K뷰티의 영토’를 물리적 거리 밖으로 확장했다. 박종대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에이피알의 놀라운 실적 개선과 사업 확장에 대해 “우수한 제품력과 압도적인 마케팅 역량, 유연한 유통전략의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며 “전사 인력의 절반을 마케팅 인력으로 채우면서 지역별, 품목별, 채널별로 최적화된 마케팅 콘텐츠를 쏟아낸 것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통해 확보한 높은 페이지뷰(PV)와 트래픽이 실제 구매로 전환되는 강력한 수익모델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와 한류라는 거대한 가속페달
    이들의 성공을 완성한 것은 시대가 던져준 결정적 환경이었다. 2020년 코로나19는 전 세계 소비 환경을 강제로 온라인에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집에 머물며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의 콘텐츠를 소비할 때 이미 디지털 유통망을 갖춘 이들은 ‘한류의 수혜’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한국 콘텐츠를 소비하는 글로벌 세대에게 한국인의 깨끗한 피부는 선망의 대상이 됐고 이들은 그 수요를 곧바로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아마존, 울타뷰티 등)으로 연결했다.

    천주혁 대표가 이끈 ‘조선미녀’의 폭발적인 성장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정확히 올라탄 사례다. 천 대표는 2018년 LA 케이콘(KCON) 행사 현장에서 수많은 인디 브랜드 중 조선미녀가 독보적으로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서구권 소비자들이 한국 특유의 ‘조선’이라는 콘셉트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데이터로 확인한 것이다. 이듬해 조선미녀를 인수한 천 대표는 탁월한 유통 감각과 마케팅 능력을 쏟아부었다. 한국콜마의 검증된 제조력 위에 서구권 맞춤형으로 벼려낸 ‘조선’의 서사를 입힌 전략은 적중했다.

    이들은 기존의 유통 문법도 파괴했다. 에이피알은 화장품에 머물지 않고 ‘뷰티 디바이스’로 영역을 확장했다. 100만원대에 달하던 고가 장비의 거품을 걷어내고 10만원대로 대중화하며 ‘뷰티테크’라는 신시장을 개척했다.



    천 대표 또한 글로벌 뷰티 공룡 로레알을 롤모델로 삼아 공격적인 M&A(인수합병)를 전개한다. 조선미녀에 이어 티르티르, 스킨1004 등 잘나가는 인디 브랜드들을 흡수하며 ‘K뷰티 연합군’을 구축했다. 지난해 3000억원대였던 매출이 올해 1조원 돌파를 눈앞에 둔 비결이다. “한국 화장품 업계에서도 시총 100조원 기업이 나올 것”이라는 그의 포부는 허황된 외침이 아닌, 변화된 산업 구조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제조업의 황금기를 지나 콘셉트와 플랫폼의 시대를 연 80년대생 리더들. 이들이 쏘아 올린 것은 브랜드의 성공만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 대한민국이 세계 시장에 던지는 새로운 생존의 공식이다. 서경배의 시대가 쌓아 올린 견고한 토양 위에서 이제 K뷰티의 뉴 리더들이 설계한 디지털 고속도로가 전 세계 뷰티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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