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사에 ‘나이 파괴’라는 용어가 본격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 새로운 밀레니엄이 개막할 때였다. 일본 제조업이 65세를 정점으로 하는 연공서열 기업문화에 갇혀 아날로그적 타성을 버리지 못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50대 초·중반 경영자들을 과감하게 발탁해 디지털 전환을 이끌었다. 그 결과가 세계 최고 효율의 자동화 설비와 정보처리 속도였다.당시 일본은 아날로그적 설비와 종신고용으로 수요 대비 너무 많은 제품을 만들고 너무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초과 설비 해소가 대규모 실업을 초래할까 산업 체질 전환을 미루고 또 미뤘다.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도는 설비를 해외로 내보냈다. 그 공장들도 아날로그였다. 2005년, 일본 최고 기업 소니는 그렇게 삼성전자에 전자왕국 자리를 넘겨줬다. 당시 삼성의 54세 최지성 사장이 이끌던 TV사업 부문 명칭은 ‘디지털미디어’였고, 소니 최고경영자(CEO)는 68세 이데이 노부유키였다.
나이가 젊다고 세상 변화를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불확실성과 복잡성이 도사리는 현대 기업조직에선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변화를 둘러싼 정보·지식에 대한 접근성은 지위가 높은 장년층에 훨씬 유리하다. 오랜 세월 단련하고 축적한 지혜와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인사철마다 세대교체를 외치며 인적 쇄신을 한다. 그래야 스스로 변한다고 느낀다. 올 연말은 더욱 유난스럽다. 주요 기업 임원 인사에서 60년대생이 일거에 밀려났다. 70년대생을 넘어 80년대생이 핵심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SK하이닉스조차 거두절미하고 60년대생을 대거 집으로 보냈다.
오랜 봉직에 따른 원숙함과 안정감은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다. 따지고 보면 기업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 나이는 저절로 먹는 것이다. 본인 노력과 성과에 연동된 것이 아니다. 창업자나 소유자가 아닌 이상, 특정 지위를 사유화할 수도 없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퇴임 통보가 당혹스럽긴 하다. 나이를 기준으로 밀려났다는 사정을 알고 나면 더욱 착잡하다. 사실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기준인가. 마음속에 반발심이 없을 수 없다. 삼성이 몇 년 전부터 임원 승진연령을 경찰 계급정년처럼 정해놓은 것은 조직의 신진대사가 피차간에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지를 보여준다.
장년층에 나이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면 7080 태생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나이가 젊다는 것 역시 능력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살아온 인생과 경력이 짧다는 것이 비교우위일 수도 없다. 기업은 젊음 자체를 사거나 고용하지 않는다. 변화와 혁신을 살 뿐이다. 기업들은 지금이 향후 10년, 20년의 변화에 대비하는 새로운 진용을 짜야 할 시기라고 보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에 따른 산업 패러다임 격변이 거의 결정적 요인이다. 20여 년 전 디지털 대전환으로 세계 제조업 지형이 완전히 뒤틀린 시대의 재연이다.
젊음이 갖는 딱 하나의 비교우위가 있다. 기존 질서에 덜 익숙할 뿐만 아니라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리를 잡으면 안정적 질서를 선호한다. 회사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돌출적이고 불규칙적이고 예외적인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자꾸 규칙을 만들고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예외를 밀어낸다. 기업이든 정부든 모든 관료주의는 그렇게 싹을 틔우고 번성한다. 젊은 임원들은 이런 타성에 덜 물들어 있다. 30대 40대 임원들을 발탁하는 최고경영자들도 바로 그런 점에 주목한다.
비록 ‘돈키호테 돌격’ 같은 엉뚱한 결말이 나오더라도 모험적 도전과 혁신적 시도를 장려하기 위해선 사람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생동하고 약진하는 젊음이 아니면 누가 AI 대전환의 거센 파도에 올라설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퇴장하는 60년대생들은 더 이상 억울해하지 말지어다. 결코 그대들 탓이 아니다. 60년대생들이 디지털 전환 시대를 온전하게 책임진 자부심을 갖고 은퇴하는 것처럼, 7080 태생들도 왜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인지를 증명해낼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위대한 세대 동행이 결실을 맺을 것으로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