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한남동 카페거리.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들어선 2층 규모의 매장 앞이 2030세대 커플들과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프랑스 아웃도어 브랜드 ‘에이글’의 팝업스토어(사진)다. 이 공간을 기획한 곳은 패션 기업이나 백화점이 아니다. TV 홈쇼핑인 롯데홈쇼핑이다. 단순히 남의 물건을 방송으로 중개하는 역할만 해선 미래가 없다는 판단에 롯데홈쇼핑은 ‘거리’로 나왔다. 경쟁력 있는 해외 브랜드를 발굴해 육성하는 ‘브랜드 디벨로퍼’가 되겠다는 비전에 따른 것이다.롯데홈쇼핑 내 ‘별동대’인 그로스비즈 부문이 주도했다. 롯데홈쇼핑은 지난달 이 조직을 이끄는 이상용 부문장(46)을 상무로 파격 승진시키며 힘을 실어줬다. 총 26명으로 구성된 이 조직은 기존 홈쇼핑 머천다이즈(MD)와 전혀 다른 미션을 수행한다. 글로벌 브랜드 판권 소싱, SNS 기반 브랜드 발굴, 국내 유망 인디 브랜드 수출 등이 그들의 몫이다. 내수와 방송에 갇혀 있던 사업 ‘영토’를 해외와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롯데홈쇼핑이 ‘업의 전환’에 나선 건 홈쇼핑산업이 벼랑 끝에 몰렸기 때문이다. TV 시청 인구는 급감하는데 비용 부담은 한계치를 넘었다. 한국TV홈쇼핑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TV홈쇼핑 7개 법인의 영업이익은 3888억원으로, 코로나19 특수를 누린 2020년(7443억원) 대비 4년 만에 47.7% 급감했다. 더 심각한 건 송출 수수료다. 지난해 홈쇼핑사들이 유료방송사업자에 지급한 송출 수수료는 방송 매출의 73.3%에 달했다.
물건을 팔아 번 돈의 7할 이상을 자릿세로 떼이는 기형적 구조 속에서 기존의 방송 판매 방식은 더 이상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위기의 순간 롯데홈쇼핑은 업의 본질을 다시 정의했다. 홈쇼핑의 핵심 역량은 방송이 아니라 수만 가지 상품 중 고객이 원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큐레이션’ 능력에 있다고 판단했다. TV 홈쇼핑 편성의 30~40%를 차지하는 패션 상품을 다뤄본 경험과 소싱 노하우를 활용해 방송용 상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브랜드를 확보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에이글은 이 같은 전략의 첫 번째 시험대다. 롯데홈쇼핑이 독점 판권을 확보했지만, 주력 판매 무대는 TV가 아닌 백화점이다. 가격대가 홈쇼핑에서 판매하기에는 높은 편이고, 홈쇼핑 주력 소비자인 40~60대가 아니라 MZ세대를 주된 타깃으로 한다. 현재 롯데백화점 잠실점 등에 매장을 운영 중이며 내년에는 대규모 플래그십 스토어를 여는 것도 검토 중이다.
이는 신동빈 롯데 회장이 강조해 온 계열사 간 경계를 허무는 협업의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홈쇼핑은 송출 수수료 압박 없는 고정 수익원을 확보하고, 백화점은 차별화된 단독 콘텐츠를 수혈받는 ‘윈윈 모델’이 될 것으로 롯데 측은 기대하고 있다. 이 상무는 “경쟁사들도 우리 시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홈쇼핑이 가진 소싱 역량을 극대화해 채널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