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되는 음악과 함께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 사이로 작은 곰이 걸어 나오는 순간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영국에서 오래 사랑받아온 캐릭터 패딩턴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입을 움직여 말하고 노래했다.
생각보다 훨씬 귀엽고 사랑스러운 패딩턴이 등장하자 관객들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뮤지컬 ‘패딩턴’은 5월 예매를 시작하면서도 주인공 패딩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마지막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분장인지, 인형인지, 로봇인지 여러 추측이 이어졌지만 제작진은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11월 1일 사보이 극장에서 열린 첫 프리뷰에서 마침내 패딩턴 모습이 공개되자 SNS는 순식간에 커튼콜 영상으로 도배됐다. 모두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살아 있는 패딩턴이 등장한 것이다.
무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럭터 ‘패딩턴’

1958년 <패딩턴이라는 이름의 곰(A Bear Called Paddington)>이라는 아동 도서에서 시작된 이 캐릭터는 지난 65년간 책, TV 시리즈, 영화, 봉제 인형, 체험형 어트랙션 등 다양한 형태로 영국인 일상에 자리 잡아왔다. 특히 2014년 영화가 세계적으로 호평받으며 시대의 상징이 됐고,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주 앉아 홍차를 마시며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나누는 특별 영상은 영국인 마음속에 오래 남는 장면이 됐다. 2025년 긴 시간 개발을 거쳐 마침내 뮤지컬 ‘패딩턴’이 공개됐다.
뮤지컬은 마이클 본드 원작의 빨간 모자와 파란 더플코트, 모자 속 마멀레이드 샌드위치 같은 익숙한 설정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패딩턴을 실제 존재처럼 구현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냈다. 영화에서는 컴퓨터그래픽이 담당하던 움직임을 무대에서는 실제 배우가 구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복잡하고 정신없는 런던의 패딩턴 기차역에 덩그러니 놓인 패딩턴의 첫 등장 장면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인형 조종자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패딩턴을 무대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데 성공했다.
패딩턴은 배우 두 명이 함께 만든다. 몸을 연기하는 사람은 비인간 캐릭터를 신체로 연기하는 크리처 퍼포머이자 모션캡처 전문 배우인 아르티 샤다. 샤는 왜소증이 있는 아시아계 배우로, 그동안 영화에서 여러 비인간 캐릭터를 연기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패딩턴 움직임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구현한다. 제임스 하미드는 무대 뒤에서 라이브로 노래하고 대사를 전달하며 동시에 패딩턴 표정을 원격 제어 장치로 조종한다.두 배우가 탄생시킨 패딩턴은 그야말로 하나의 생명체였다. 샤의 신체 연기와 하미드의 목소리·표정 연기가 결합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었다. 커튼콜에서 샤가 슈트를 벗고 등장했을 때 어린 관객들이 놀란 듯 부모 얼굴을 바라보던 모습은 이 캐릭터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됐는지를 말해준다. 이 캐스팅은 기술적 선택일 뿐만 아니라 조건과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이 완전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작품의 근본 정서와 맞닿아 있다. 이는 다양성과 포용을 지향하는 런던 극장 흐름과도 연결된다.
이런 무대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창작진의 치밀한 설계가 있었다. 루크 셰퍼드 연출은 복잡한 군무와 퍼펫 조작, 세트 전환을 혼란 없이 조율했고, 톰 플레처의 가사와 음악은 유쾌함과 따뜻한 감성을 품고 곡마다 다른 느낌으로 작품 분위기를 잡아줬다. 무엇보다 실제처럼 느껴지는 패딩턴을 완성한 핵심은 생명체형 캐릭터·퍼펫 디자이너 타라 자파르다.
30년 넘게 영화, TV, 공연, 라이브 이벤트에서 대표적 캐릭터를 창조해온 그는 ‘진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데 업계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다. 자파르는 섬세한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총동원해 패딩턴의 신체 구조, 움직임, 털의 질감,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설계했다. 노래할 때 입이 움직이는 방식까지 실제 생명체에 가깝게 디자인한 덕분에 관객은 패딩턴을 인형이나 장치가 아니라 존재하는 캐릭터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포용과 인류애 노래하는 찬가

수년에 걸쳐 준비한 뮤지컬 ‘패딩턴’은 구성이 알차게 짜여 있다. 무대 역시 볼거리가 풍성하다. 자연사박물관을 표현한 장면은 시각적 압도감을 선사하고 런던을 상징하는 택시, 기차, 비둘기 등은 유머와 풍자로 재창조돼 도시의 활력을 전한다. 특히 ‘런던의 리듬(The Rhythm of London)’은 도시 자체를 노래하는 넘버로, 자칫 유치할 수 있는 도시에 대한 찬가를 흥겨운 한 장면으로 녹여낸다. 거기에 관객과 함께 부르는 마멀레이드 노래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쉬운 멜로디로, 공연 후에도 계속 흥얼거리게 만든다.
이 뮤지컬은 ‘런던’을 반복하며 노래하는 완벽한 관광 상품 같지만 이야기 구성과 표현 방식을 통해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패딩턴을 발견해 집으로 데려온 브라운 가족의 관계, 사춘기 딸과 엄마의 화해, 까다로운 이웃 미스터 커리와의 갈등, 사악한 박제사 밀리센트 클라이드와의 대립까지 다양한 서사가 촘촘하게 엮여 있어 극의 흐름을 풍성하게 만든다. 각 캐릭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배우들은 그 서사를 풍부하게 표현해 관객이 놓치기 쉬운 작은 감정선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다. 엄청난 연습량이 느껴지는 앙상블의 완벽한 합은 무대를 더욱 빛냈다.
2시간40분 동안 공연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따뜻하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졌지만 새로운 가족을 찾아 나서는 패딩턴은 “런던에서는 모두가 다르고, 그래서 누구라도 여기 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58년 원작이 사실상 난민 아동을 받아들이는 영국인의 이야기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말은 다양성과 포용을 향한 선언처럼 다가온다. 이 작품은 이민자 문제로 갈등이 첨예한 오늘 영국 사회에서 친절함과 관대함, 열린 마음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패딩턴의 순수한 눈과 작은 친절, 예의를 잊지 않는 태도는 우리가 잊고 있던 감정을 차분히 떠올리게 한다. 작은 배려 하나가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누구든 이 도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확신, 서로를 향한 예의는 이 뮤지컬의 핵심을 이루는 메시지다.
장애 배우가 무대 중심에서 환호받는 모습은 작품이 담아낸 다양성과 협력적 인류애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패딩턴은 상업 뮤지컬을 넘어 런던이라는 도시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사건이다. 뮤지컬 ‘패딩턴’은 런던을 향한 찬가이자 다양성을 축복하는 이야기이며 창작진의 오랜 연구와 헌신이 만들어낸 따뜻한 세계 그 자체다.
런던=정재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