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희 SK온 사장은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반도체 전문가로 손꼽힌다. 2000~2010년 미국 인텔에 있을 때 ‘인텔 성취상’을 3회 수상했다. 인텔 직원들이 동료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다. 노모를 돌보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자 인텔이 그를 붙잡기 위해 6개월 이상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이후 그는 3년간 KAIST에서 재직했다. SK그룹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고대역폭메모리(HBM) 탄생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정밀 공정 관리를 요구하는 반도체 분야 경험을 살려 배터리산업에 투신한 이 사장은 이공계 부활을 위한 묘수로 ‘적재적소’를 꼽았다. “SK하이닉스에서 HBM을 개발한 인력이 왜 다른 부서 직원과 비슷한 임금을 받아야 하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과거의 ‘인재 방정식’으론 의대 쏠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이공계를 기피할까요.
“꿈과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에 없던 것을 이공계에서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을 때 따라오는 경제적 보상이 필요해요.”
▷예전에는 안 그랬죠.
“1970~1980년대엔 1등이 물리학과를, 2등이 공대를 갔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곳곳에 포진해 있었고 성공한 선배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어떻게 하면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습니까.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30~40대에 연봉 200억원 이상을 버는 인재가 1000명만 나오면 됩니다. 중·고등학생이 꿈꾸는 풍요로운 삶을 이공계에서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죠.”
▷꿈의 숫자 같네요.
“어렵지 않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1년에 100명씩 10년 동안 꾸준히 성공한 엔지니어를 배출하면 됩니다. 대학생이 쉽게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기업이 성과를 낸 인재에게 확실한 보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창업 환경이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맞아요.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토양이 돼 있는지 돌아봐야 해요. 창업에 실패하면 신용불량자가 되고, 벤처캐피털(VC)은 여전히 2~3년 안에 엑시트(투자금 회수)할 수 있는 아이템에만 관심 있는 상황에선 창업하기가 어렵죠.”
▷중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대학 졸업생 중 창업하는 비율이 5%도 채 안 될 거예요. 중국은 대학 졸업생 중 15%가 창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양국 대학 졸업생 숫자가 대략 1000만 명, 30만 명이니 단순 계산해봐도 양국 창업자는 각각 150만 명과 1만5000명으로 100배 차이가 날 거예요.”
▷중국 창업 시스템의 장점은 뭔가요.
“장점이라기보다 방식이 달라요. 중국은 정부가 주도해요. 스타트업 단계별로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금을 집중 지원합니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다른 부서가 또 지원해주는 식으로 바통 터치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미국 시스템을 잘 이식했어요.”
▷국가 주도가 대안인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중국만 놓고 보면 정부가 잔인할 정도로 경쟁시킵니다. 완전한 승자 독식 구조예요. 여기서 뒤처진 회사는 1~2위 기업에 흡수되는 게 일상입니다. 반대로 승자는 곧바로 정부 지원 아래 글로벌 챔피언이 될 수 있죠. 동기부여가 잘되고 있어요.”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만의 투자 관행부터 깨야 합니다. 2~3년이 아니라 5~7년 이상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등 돈에 대한 기대치를 바꿔야 합니다. 투자 비용 일부를 창업자에게 부담하는 일도 없애야 하고요.”
인터뷰에 동석한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도 이 사장 의견에 공감했다. 황 교수는 “서울대 교수만큼 창업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지만 주변에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며 “교수마저 투자금을 조달하느라 개인 돈을 쓰고, 빚쟁이가 되는 구조에서 학생들의 창업을 독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 현장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 선배로서 이공계 졸업생을 어떻게 배치하고, 이들의 꿈과 자부심을 키울지 고민했지만 뚜렷한 해법은 못 찾았습니다. 다만 과거의 ‘성장 방정식’이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건가요.
“대기업이 공개 채용을 통해 대규모로 인력을 뽑고, 전공에 상관없이 필요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인력을 배분하기보다 직무에 맞게 사람을 뽑고, 직무별로 성과에 맞게 임금도 다르게 지급해야 합니다.”
▷직무급제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습니다. 한 부서 또는 각 직무에서 필요한 인력을 상시 채용하고, 이들이 낸 성과에 따라 보상해야 합니다. SK하이닉스에서 HBM을 개발한 인력이 왜 다른 직원과 같이 왜 1억원만 받아야 하나요. 몇 배 더 인센티브를 줘도 됩니다.”
▷직원들의 반발이 있지 않을까요.
“한국이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형평성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성과를 낸 만큼 보상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 수 있어야 이공계 후배가 꿈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요.”
▷미·중은 어떤가요.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직무급제가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괜찮은 집을 엔비디아 직원이 모두 사가서 집값이 치솟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니까요. 집 한 채에 수백만달러인데 회사가 잘되는 만큼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실리콘밸리보다 더 성과 중심으로 굴러갑니다.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연구원이 적지 않아요.”
▷이공계 출신 스타 최고경영자(CEO)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한국이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30~40년 전엔 이공계 연구원이 대접받던 시절도 있었죠. 1990년대 삼성전자가 당시 연구원이던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전 삼성전자 사장) 사진을 전면 광고로 실었던 게 떠오르네요.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엔지니어를 내세운 겁니다. 대학생이던 제가 반도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진 회장 같은 롤모델 덕분이에요.”
미스터 디지털(Mr.digital)로 불리는 진 회장은 한국 반도체 신화의 주역이다. IBM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동향(경남 의령)인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스카우트 제의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사장까지 승진했다.
▷요즘엔 이런 롤모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연봉제 또는 호봉제에서 한국 엔지니어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잘해야 승진을 통해 월급을 조금 더 받는 것인데, 의사를 하거나 변호사를 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이런 시스템에선 꿈과 비전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고3 수험생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잠시 고민한 뒤) 미국에선 무조건 공대를 보낼 겁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가르치고 성공한 정보기술(IT)업계 경영자를 보여주면서 공학도의 꿈을 키워줬을 것 같아요. 다만 한국에선 여전히 의대에 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그럼에도 공학도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심리학자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추론 및 수리적 능력을 좌우하는 ‘유동지능’은 만 25세에 정점을 찍는다고 합니다. 지혜에 관여하는 결정지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쌓이죠. 인문학적 지식이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한다면 수리적 능력은 젊을 때 최고점을 찍는데, 이런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됩니다. 이공계 출신이 나중에 경영학을 공부하는 건 가능하지만 경영학도가 나중에 공학을 연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죠.”
▷현장에서 이공계 인재 부족을 느끼나요.
“심각할 정도로 인재가 부족합니다. 절대적 숫자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필요한 인재’가 부족합니다. 전 세계 인재가 몰리는 미국, 1년에 대학 졸업자가 1000만 명인 중국과 비교가 안 될뿐더러 한국은 그나마 훌륭한 인재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고요. 미국식 직무급제를 도입해 훌륭한 인재를 한국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 이석희 사장은…
△1965년 서울 출생
△1988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90~1995년 현대전자 선임연구원
△2001년 미국 스탠퍼드대 재료공학 박사
△2000~2010년 인텔 기술·프로세스 통합그룹 리더
△2010~2013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2013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
△2018년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2024년 SK온 대표이사 사장
김우섭/안시욱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