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 얘기다. 시간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일상엔 여백이 있었다. 그 틈을 타 사람들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걸 즐겼다. 이런 느슨한 시간이 몇몇 공간과 포개지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청계천 고가 아래 헌책방, 종로 골목마다 보였던 비디오방이 그랬다. 극장도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역으로 걷는 길목에 문을 연 한 예술영화관은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여느 멀티플렉스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영화 한 편에 만남과 이별, 다툼과 화해 따위가 피어났다.
지난 2일 서울 신문로1가 씨네큐브에서 상영된 ‘극장의 시간들’은 독립·예술영화와 극장의 존재 이유를 여러 갈래로 묻는다. '극장의 시간들'은 ‘침팬지’, ‘자연스럽게’, ‘영화의 시간’ 세 단편을 묶은 94분 남짓의 앤솔로지 영화다. ‘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세계의 주인’의 윤가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종필 감독이 참여했다. 각자의 시선을 녹여냈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같다. 요약하면 ‘극장에서 느꼈던 희노애락은 지금도 유효한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영화관 씨네큐브 25주년을 맞아 제작됐기 때문이다.

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침팬지’는 씨네큐브가 문을 연 때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방황하는 한 청년이 극장을 도피처 삼아 꿈을 키워간다는 얼개다. 시간이 흘러 함께 영화를 봤던 옛 친구들은 멀어졌고, 종종 별 볼일 없는 영화감독으로 자란 것 같은 허무감이 지배해도 그 시절 극장에서 얻은 감정이 살아가는 힘을 준다는 것. 윤 감독의 ‘자연스럽게’도 비슷한 결의 고민이 녹아있다. 극장을 매개로 만난 관객과 제작진이 어떤 영화를 볼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지를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촬영하는 감독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장 감독의 ‘영화의 시간’은 극장의 필수요소지만 덜 조명받는 구성원들로 시선을 돌렸다. 영사실의 영사기사, 상영관을 치우는 청소 노동자, 우연히 극장에 들른 관객과 영화 한 편 보기 위해 반차까지 내고 달려오는 직장인까지 극장에서 각자의 시네마틱한 삶을 채워나간다는 은유가 자못 재밌다.
‘극장의 시간들’은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 받았다. 지난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선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돼 상영됐는데, 당시 영화제를 찾은 이재명 대통령 내외가 관람해 눈길을 끌었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에서 씨네큐브의 생존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은 68곳에 불과하다. 2021년 542개였던 전국 극장 수가 지난해 570개로 늘었지만, 독립·예술영화관은 1개 줄었을 만큼 성장이 멈췄다.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보니 한국 독립·예술영화 개봉 편수도 매년 줄어들고 있다. 이날 영화 상영에 앞서 열린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장 감독이 “예전에는 예술영화관이 제법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많이 사라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씨네큐브는 오는 7일까지 연말 기획전 ‘2025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을 진행하는 등 앞으로도 국내외 예술영화를 소개한다는 계획이다. 엄재용 티캐스트(씨네큐브 운영사) 대표는 “앞으로도 도심 속 예술영화관으로 더 좋은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