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7일 찾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센트럴역. 하루 평균 12만 명이 드나드는 ‘교통 메카’인 이곳은 NIF(신규 도시 간 열차)를 오르내리는 승객들로 북적였다. 수백 대의 NIF 중 가장 인기 있는 열차는 작년 12월 투입된 ‘마리융’(Mariyung·호주의 상징 새 ‘에뮤’의 원주민 발음)이다. 현대로템이 국산 기술로 만든 2층 전동차다. 호주 정부가 실시한 고객 만족 설문에서 시드니 최고 열차로 꼽힌 이 열차 40여 대는 현재 시드니 북부·서부 노선을 달리고 있다.
◇2871건 수정으로 태어난 ‘종이 열차’
현대로템이 마리융 프로젝트를 따낸 건 2016년이었다. 16억호주달러(약 1조5400억원)를 들여 열차 610량을 도입하는 호주 역대 두 번째 규모의 열차 프로젝트에 도전해 프랑스 알스톰, 중국 중궈중처(CRRC), 스위스 스테들러 등 강자들을 제쳤다.호주에서 수주 실적이 없었던 현대로템이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비결은 ‘현지 맞춤형 설계’였다. 호주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애인 교통접근성 기준’(DSAPT) 달성에 올인한 게 대표적이다. 마리융 프로젝트는 호주 최초로 DSAPT 철도차량 부문 기준을 100% 달성했다. 13개월 동안 장애인단체 등 이해관계자들을 215차례 만나 이들이 건넨 2871개 건의를 열차 설계에 반영한 결과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요구 사항이 많은 호주 전동차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면 인허가 서류 수천 장을 첨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종이 열차’로 불리기도 한다”며 “미리 제작한 실물 모형을 통해 수시로 이해관계자들의 피드백을 받아 설계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날 1시간30분가량 타 본 마리융 열차는 현대로템의 설명대로 승객을 꼼꼼하게 챙기는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열차에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별도로 마련됐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청 안내 서비스도 제공됐다. 이전까지 호주 열차에 없었던 기능이다. 승객이 쓰러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상 버튼을 바닥에도 설치했다. 휠체어를 타고 탑승한 마거릿 무어(58)는 “마리융 덕분에 남편 도움 없이 혼자 출퇴근할 수 있게 됐다”며 “열차를 예매할 때 마리융 여부부터 확인한다”고 말했다.
◇호주 이어 뉴욕도 정조준
현대로템은 2023년 14억호주달러(약 1조3500억원)짜리 퀸즐랜드 QTMP 전동차 공급 계약도 수주했다. 이때도 알스톰과 중궈중처, 스페인 카프(CAF) 등을 꺾었다.현대로템은 호주 수주 경험을 앞세워 글로벌 철도 사업을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이미 지난 1월 모로코에서 2조2000억원 규모 전동차 사업을 따냈고, 9월에는 시드니메트로웨스트(SMW) 무인 전동차 프로젝트(96량) 입찰에도 뛰어들었다. 내년에는 우즈베키스탄에 고속철도를 수출하고, 모로코에 전동차 유지보수 합작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은 “미국 뉴욕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베트남 수주 사업에도 진출할 것”이라며 “차체 제작을 넘어 운영과 유지보수, 신호 사업을 아우르는 토털 열차 솔루션 제공 업체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시드니·브리즈번=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