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은 그 어느 때보다 로펌의 존재감이 강했다. 국내외 정책이 경제를 흔드는 핵심 변수가 됐고 로펌의 무대는 법률을 넘어 산업, 기술, 정책, 국제질서를 넘나드는 ‘종합 전장’으로 확대됐다.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굵직한 송무도 이어졌다.
특히 대기업 총수들의 사법 리스크가 걸린 민형사소송 판결이 나오면서 송사를 이끌었던 로펌은 사회적 영향력을 증명했다. 로펌 업계 경쟁도 치열해졌다.
각 로펌이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산업계 인재를 빨아들이며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종합 컨설팅 조직으로 진화했고 율촌과 세종의 성장으로 4000억원대 매출을 겨루는 로펌 간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올해 로펌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 5가지를 정리했다.
1. 싱크탱크 빈자리 채운 로펌
지난해 11월 치러진 미국 대선 이후 달라진 수출 규제와 글로벌 공급망 변화로 국제 환경이 급변했고 6월 대선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내 정책 변화도 급격하게 이뤄졌다. 기업들은 새로운 수출 전략을 짜고 규제 대응 해결책을 찾기 위해 로펌을 찾았다. 로펌도 진화했다. 민간 싱크탱크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 한국에서 로펌은 규제 해석, 입법 대응, 기업 전략 수립까지 실질적 정책 지원을 수행하는 유력한 외부 자원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기업들이 정책 리스크에 즉각 반응해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로펌의 입지가 커졌다.로펌은 각 분야 전문 센터를 출범해 새로운 법률 수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2. 인재 블랙홀
종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로펌이 가장 먼저 나선 일은 인재영입이다. 고위 관료 출신과 대기업 사내변호사, 산업계 전문가, 국회 보좌관 등 각계 리더와 전문가들을 영입했다.광장은 안경덕 전 고용노동부 장관과 류근혁 전 보건복지부 2차관, 박선호 전 국토교통부 제1차관,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 최무진 전 공정거래위원회 카르텔조사국장을 영입했다.
율촌은 문승욱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통상산업전문팀 고문으로 영입하고 최성호 전 감사원 사무총장, 문재인 정부 청와대 방위산업담당관 등을 지낸 최용선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전문위원으로 영입해 국정과제 대응 역량을 보강했다.
세종에는 권덕철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민석 전 고용노동부 차관 등이 합류했다.
화우는 청와대 일자리수석을 역임한 임서정 전 고용노동부 차관, 박진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나재철 전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김동회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 신영호 전 공정위 상임위원 등을 영입했다.
올해 고위급 법조계 출신도 로펌으로 향했다. 검찰에서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담당해 ‘특수통’으로 손꼽히는 김후곤(연수원 25기) 전 서울고검장은 광장에 합류했다. 송무팀에는 김정원 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함윤식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이 합류했다.
율촌은 문재인 정부 때 법무부 검찰국장, 검찰총장 직무대리 등을 지낸 조남관(24기) 전 대검찰청 차장을 영입해 형사팀 역량을 강화했다.
세종은 장영수 전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24기)을 비롯해 조찬영 전 서울고등법원 고법판사(29기), 권양희 전 안양지원장(30기), 김세종 전 서울고등법원 고법판사(30기) 등 검찰 출신을 대거 영입, 송무 분야를 강화했다.
화우는 이오영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29기), 박정대 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31기), 박동복 전 수원고법 부장판사(35기)를 영입해 전통적으로 강했던 송무 역량을 한층 높였다.
3. 조 단위 송무로 대중에 존재감 각인
올해 주요 기업 총수들의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판결이 이어졌다. 대중이 주목한 사건에서 활약한 로펌은 기업의 핵심 경쟁력을 흔들 수 있는 경영 공백과 금전적 손실을 방어하면서 존재감을 키웠다.김앤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형사사건을 대리해 지난 7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공판기일 횟수 총 114회, 증인 80명, 공소사실 20개, 판결문 1614페이지(1심), 재판 소요 기간만 4년 10개월에 달하는 이 사건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김앤장은 이 회장을 대리해 1, 2, 3심 모두 무죄 판결을 이끌며 삼성그룹의 사법 족쇄를 풀었다.
화우는 이 소송에서 삼성물산 경영진을 변론해 19개 혐의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내며 방어에 성공했다. 화우는 검찰의 사실관계 오인, 법리적 근거 부족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1, 2, 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법원은 화우의 주장을 받아들여 압수수색 자료 일부에 대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회계 부정 및 불법 거래 의도도 없다고 판단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세기의 이혼’ 소송에서는 율촌이 활약했다. 율촌은 최 회장을 대리해 2심에서 내려진 1조원대 재산분할 판결을 뒤집으며 파기환송을 이끌어냈다. 율촌은 2심 재판부의 판단에 법률적 오류가 있음을 파고들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300억원 비자금이 유입돼 성장한 SK 주식을 노 관장의 기여로 인정할 것인지가 재산분할의 관건이었다.
율촌은 민법 746조상 불법원인급여의 법리를 적용해 불법자금은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변호했다. 지난 10월 대법원이 2심 법원의 판단을 뒤집어 파기환송하면서 최 회장의 재산분할 액수는 서울고등법원에서 다시 심리한 후 새롭게 결정될 예정이다.
광장은 카카오 시세조종 사건 1심에서 카카오를 대리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4. 4000억대 4강 체제
법률 시장 수요가 급증하면서 로펌 경쟁도 치열해졌다. 특히 올해 율촌과 세종이 성장하면서 로펌업계 2, 3위였던 광장, 태평양과 함께 40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는 ‘4강 체제’를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지난해 주요 로펌의 국내 법무법인 매출은 광장(4111억원), 태평양(3918억원), 율촌(3709억원), 세종(3698억원) 순이었다. 광장은 지난해 연매출 4000억원 시대를 연 최초의 법무법인(김앤장 제외)이었다. 율촌과 세종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특히 올해 두 로펌이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하며 빠른 속도로 4000억원의 벽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법률 시장 관계자는 “4개 로펌의 고객군이 비슷한 만큼 내년 4000억원대 로펌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5. 폐쇄형 AI 전환
AI 시대를 맞이한 로펌은 ‘리걸테크’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장 큰 과제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고객 기밀 유지’와 정보보호다. 범용 AI를 활용하려면 사건 증거나 문서 등 민감한 고객 정보를 플랫폼에 업로드해야 하는데 이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형로펌은 기업 고객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범용 AI 활용을 극도로 제한하고 막대한 투자를 통해 자체 AI 구축에 나서고 있다.
세종은 국내 로펌 중 최초로 자체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로펌 업무에 최적화된 생성형 AI를 구축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환경에서 독자적인 데이터 학습과 고도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AI 시스템의 정보보안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이와 별개로 글로벌 법률 AI 서비스인 ‘하비’를 활용해 계약서 작성이나 검토, 판례 검색 등 로펌 업무에 최적화된 AI 솔루션을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율촌도 2년 전부터 독자적인 AI 시스템 구축에 돌입해 곧 시행을 앞두고 있다. 율촌은 28년간 축적한 내부 지식과 외부 법률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AI 시스템을 설계했다. 율촌의 핵심 전략도 내부 폐쇄형 시스템이다. 율촌은 변호사들이 개인 하드디스크를 사용할 수 없고 모든 작업물과 데이터를 중앙 서버에만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보안에 철저하다. 자체 AI도 변호사들이 고객 관련 질의를 하거나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학습하지 못하도록 설계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