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는 스타트업이 2000만달러를 유치하면 95%를 기업 성장과 인력에 투자하고 임원 보상에는 5%를 배정했다. 이제는 대부분 자금이 소수 임원을 영입하는 데 쓰인다.”
보안스타트업 시큐리티팔의 푸카르 하말 창업자가 최근 한 칼럼에서 언급한 벤처 생태계 변화의 단면이다. 벤처캐피털(VC)이 탐낼 만한 인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VC 투자를 받기 어렵다는 고충을 표현한 것이다. 미국 최대 VC 중 하나인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의 마틴 카사도 제너럴파트너스도 자사 홈페이지에 비슷한 맥락의 글을 올렸다. “최근의 성공적인 인공지능(AI) 프로젝트는 적은 인원으로도 매출과 사용자 측면에서 역사적인 성장을 달성하고 있다”고 했다.
◇AI 칩 개수가 스타트업 경쟁력

AI 시대가 본격 개막하면서 벤처 투자의 공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예전 VC들은 성장 잠재력이 큰 스타트업을 발굴해 이들이 단계를 밟아 성장하는 과정 전반에 투자하곤 했다. 자본이 불어나고, 인력이 늘어나면서 스타트업이 겪게 될 고충과 자금을 해결해주는 데 VC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AI 시대엔 VC가 ‘헤드헌팅 기업’에 가까워졌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웹 2.0’ 혹은 플랫폼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만 해도 스타트업이 대형 상장사로 도약하려면 대규모 개발 인력 확보가 필수였다. 소프트웨어 기능을 고도화하기 위해 코드를 짜고 수만 가지 규칙을 입력해야 했기 때문에 제품 품질은 인력에 정비례했다. 아마존이 대표 사례다. 대형 플랫폼 기업의 성장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저렴한 정보기술(IT) 인력까지 대거 활용하는 등 거대한 IT 하청 생태계를 구축했다. AI 시대에 접어들면서 양상이 바뀌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AI 칩 개수에 기업 경쟁력이 정비례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등 ‘자본 전쟁’으로 전환됐다. 이를 활용할 인재는 소수 정예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튜링상을 받은 리처드 서튼 캐나다 앨버트대 교수는 2019년 일찍이 이런 현상을 예견했다. 그는 “인간의 통찰력에 투자하기보다 AI의 무차별 대입 검색이나 대규모 데이터셋을 통한 학습에 투자하는 게 낫다”며 이를 ‘씁쓸한 교훈’(bitter lesson)이라고 표현했다.
◇스타트업 1인당 자금 조달 2배
AI 핵심 인재를 보유한 스타트업들은 ‘네오랩스’라는 새로운 명칭까지 얻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오픈AI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일리야 수츠케버(사진)가 창업한 세이프슈퍼인텔리전스는 창업 1년 만에 320억달러(약 47조원)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직원은 지난 7월 기준 50명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 데이터 기업 레비오랩스에 따르면 시리즈A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직원 1인당 조달 자금 중간값은 2020년 16만달러에서 올해 33만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이 같은 추세는 갈수록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VC로선 ‘스타트업들이 인원을 늘리면서 초기 스타트업의 민첩함을 잃는다’는 전통적인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카사도 파트너는 “재능있는 팀을 파괴하지 않고도 그들에게 꾸준하고 확장 가능한 자본을 투자할 수 있다”며 “이는 투자자들에게 달콤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AI 핵심 인재를 보유하지 못한 스타트업은 투자 라운딩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스타트업 사이에선 ‘빅테크의 부사장들을 노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빅테크에서 AI 개발을 주도했거나 빅테크에 인수된 스타트업 직원들이 대형 조직의 관료적인 문화에 발목이 잡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말 창업자는 “명확한 방향만 제시하면 200만~300만달러짜리 주식 패키지만 제공해도 이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