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이 스크린에 걸린다. 19일 국내 개봉하는 영화 ‘국보’다. 일본 전통극 가부키에 인생을 건 두 남자의 기묘한 삶을 그린 175분 대서사시다.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가 신문에 연재한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훌라걸스’(2006)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이 영화화했다. 일본에서만 12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다.
일본 극장가의 ‘국보’ 신드롬은 흥미롭다. ‘귀멸의 칼날’ 등 애니메이션이 지배하는 일본에서 실사영화로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 층과의 접점이 흐릿해진 가부키를 소재 삼아 ‘숏폼’ 시대를 역행하는 초장편 ‘극장용 영화’를 제작했는데, 2030세대를 열광시켰을 뿐 아니라 오래전 극장을 떠난 중·장년층까지 불러들였다.
17세기 시작된 가부키는 수백 년을 살아남았다. 풍기 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나라에서 막자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는 ‘온나가타’라는 배역을 만들면서까지. 연애, 치정 같은 레퍼토리가 인기였으니 온나가타는 꼭 필요했고, 1950년대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야쿠자 두목의 아들 기쿠오(요시자와 료 분, 아역 구로카와 소야)는 그 재능을 타고났다. 당대 가부키 스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겐 분)는 기쿠오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요염한 춤 선에 매료된다. 그는 경쟁 야쿠자와의 항쟁으로 기쿠오 아버지가 죽고 조직이 와해되자 이듬해 기쿠오를 가부키 예술의 중심 오사카로 부른다. ‘가부키 견습생’ 신분을 주고 자신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 아역 고시야마 게이타쓰)와 함께 키우며 훈련시킨다.
기쿠오와 슌스케는 형제처럼 가부키를 연습한다. 하지만 정점에 오를 수 있는 건 단 한 명. 지병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자신의 빈자리를 채울 사람으로 슌스케가 아니라 기쿠오를 지목하고, 자신의 이름 ‘한지로’까지 물려준 것. 대대로 가업을 잇는 전통답게 가부키 예술에서도 혈족 후계자가 선대의 이름과 배역을 물려받는 습명(襲名)이 있었으니,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슌스케는 떠나고 기쿠오는 ‘라이징 스타’로 박수갈채를 받게 된다.
기쿠오는 재능은 타고났지만, 핏줄이 없다. 전통을 고수하는 이 세계에서 혈통이 받쳐주지 않는 재능은 금세 빛이 바랜다. 반면 핏줄을 가진 자는 재능이 다소 모자라도 재기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은 엎치락뒤치락 엇갈린다. 그래서 기쿠오는 어느 날 슌스케를 질투하며 “네 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딸에겐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 다른 건 필요 없다며 “악마와 거래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세운다.
정교하게 설계된 색의 대비로 대표되는 시각미는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 강렬한 색깔이 강조되는 일본 전통극을 소재 삼은 작품답게, 마치 일본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 작품이나 1960~1970년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인간예찬’에 초점을 맞춘 영화의 내용은 가부키를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고, 긴 러닝타임 동안 시간순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이따금 지루함을 안긴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