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나를 잃은 상실감은 잠시, 전 세계 무용계의 근심은 그녀의 부퍼탈 탄츠테아터에 쏠렸다. 갑자기 선장을 잃은 이 배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영광의 이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인생을 찾을 것인가. 이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예술감독과 전성기를 함께한 예술단에게 늘 부여되는 운명적인 숙제이다. 전 예술감독인 이리 킬리안이 사전에 은퇴를 고지하며 무용단에 준비할 여지를 주고, 은퇴하고 나서도 여전히 예술적 자문을 아끼지 않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미래를 준비할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히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피나의 부재에도 세계 무대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에도 <봄의 제전>(2010), <풀문>(12014), <스위트 맘보>(2017)를 가지고 찾아와 생존 신고를 했다. 매년 한국에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올린 그들이었건만, 이번 8년 만의 내한을 위해서는 어쩐 일인지 <카네이션>을 들고 왔다. 그들의 첫 내한작이자 역삼동 LG아트센터의 2000년 개관 기념작이었던 바로 그 레퍼토리이다.

2000년 당시 부퍼탈 테아터의 첫 내한을 진두지휘했던 LG아트센터 이현정 대표는 사실 새로운 작품에 욕심이 더 많았다고 한다. “역삼동 시절 무대가 협소해서 가져오지 못했던 <팔레르모 팔레르모> 같은 스케일 큰 대작이 욕심이 났지만, <카네이션>을 보지 못한 젊은 직원들의 아쉬움이 컸고 부퍼텔 테아터 측의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 2000년 개관할 당시에도 새롭게 문을 연 공연장에 희망을 주고 싶다며 피나 바우쉬가 직접 골라준 작품이 바로 <카네이션>이었던 만큼, 처음 서보는 마곡 무대에도 똑같은 희망을 심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들의 바람대로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9000송이 카네이션이 무대를 뒤덮어 시작 전부터 장관을 연출했다. 미장센과 시각적 상상력을 중시하던 피나 바우가 전설의 무대 디자이너 페터 팝스트에게 의뢰한 무대 연출은 예나 지금이나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다만 공연 시작 전 무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관객들의 모습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인 2000년도와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물론 또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대교체였다. 피나 바우시를 만나보지도 못한 2019년 입단한 신진 단원들이 출연진의 대부분을 이루었고, 25년 전 카네이션 한국 초연 무대에도 올랐던 무용수는 안드레이 베진과 아이다 바이네리 두 명 뿐이었다. 출연진 규모도 2000년 25명에서 오리지널 세계 초연 당시 원래 규모인 17명으로 축소되었다. 옛세대와 신세대의 차이는 탄츠테아터, 즉 연극과 춤의 조합인 장르의 특성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연령과 역할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중견 무용수들은 탄탄한 연극적 표현력이 돋보였던 반면 대다수의 젊은 무용수들은 대사나 연기보다 춤, 즉 무용적인 연기에서 더욱 자유로움을 느끼고 정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결점으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피나 바우쉬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않은 젊은 세대가 그녀의 유산을 자신들의 관점에 맞춰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꽃밭 위에 책상을 두고 네발로 추는 ‘도그 댄스(dog dance)’(이 작품은 피나 바우가 안데스 산맥 카네이션 들판에서 뛰노는 셰퍼드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의 경우, 2000년도 중견 배우들의 춤이 능청맞고 해학미가 넘쳤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젊은이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신선함이 부각됐다. <카네이션>의 상징적인 피사체인 아코디언을 맨 여장남자도 2000년도에는 남성 무용수가 연기한 반면 이번 무대에는 실제 트렌스젠더 무용수가 등장해 시대의 변화를 알렸다.
이런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조는 어떤 의미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희망’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카네이션>의 본래 메시지에 생기를 부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자유롭게 꽃밭에서 뛰노는 젊은 무용수들에게 여권을 보여달라며 압박하는 중견 무용수의 모습은 예전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왔고, 저 유명한 의자 춤은 이같은 갈등의 정점을 이루었다.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의자를 쟁취하고, 빼앗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며 앉았다 일어서는 과정은 인간 사이의 갈등과 권력 다툼을 다이내믹하게 드러냈으며,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는 그러한 불안과 미묘한 관계망에서 느끼는 젊은이들의 소외와 고독을 은유했다.
하지만 삶은 영원할 수 없는 법. 작품은 재즈곡(Last Night I Dreamed You Kissed Me)에 맞춰 봄·여름·가을·겨울을 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수들의 행진으로 여운을 가지고 막을 내린다. 소동 끝에 짓밟힌 카네이션이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나듯, 세상은 돌고 돌며 젊은이들과 함께 이 세상에는 다시 새로운 희망이 도래할 것이라는 피나 특유의 메시지이다.
2000년도 공연과 또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은 무용수들의 한국어 사용이다. 공연하는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즉흥적으로 무대에 흡수하려는 시도는 피나 바우쉬 생전부터 늘 이어져 온 노력이다. 하지만 올해 무용수들은 25년 전보다 훨씬 많은 한국어를 사용했다. 공연 초반부에는 내용 전달이 분명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지만 갈수록 발음이 또렷해졌고, 마지막 자신들을 소개를 할 때는 모든 무용수가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들에게 한국어를 지도한 전 부퍼탈 탄츠테아터 단원 김나영은 “한류에 매료된 젊은 무용수들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적극적이어서 예전보다 더 많이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노승림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