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CGV 매장. 입구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등장인물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선 관객들이 저마다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곳곳에 작품 주인공 ‘루미’와 같은 복장을 한 팬들이 눈길을 끌었다. 케데헌 응원봉을 들고 인증샷을 남기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극장은 친구, 연인뿐 아니라 가족 단위 관람객도 평소보다 더 눈에 띄었다.
최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확산과 흥행작 부재로 썰렁했던 극장가가 오랜만에 관객들 발길로 붐볐다. 넷플릭스 인기 애니메이션 케데헌의 싱어롱(sing-along) 상영이 진행되면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늘어난 덕분이다. 업황 둔화로 극장가가 침체되는 분위기 속에 팬덤을 겨냥한 체험형 콘텐츠로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 '돌파구'라는 분석이 나온다.
케데헌 효과 톡톡히 본 극장가

넷플릭스는 CJ CGV와 손잡고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2일까지 케데헌의 싱어롱 특별 상영회를 열었다. 싱어롱은 영화 속 노래와 춤을 관객이 함께 따라 하며 즐기는 참여형 상영 방식을 말한다. 전국 100여 개 CGV 매장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사흘 동안 약 4만 관객을 모았으며 일부 상영관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될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실제 영화관 현장에서도 팬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동생과 함께 영화관을 찾은 김모 씨(20대)는 “이번 싱어롱 상영 기간 동안만 총 세 번 영화를 관람했다. 평소에도 케데헌 노래를 좋아해서 많이 듣는데 영화관에서 들으니까 확실히 다르다”면서 “코스튬 의상을 입고 다같이 응원봉을 흔들면서 보니까 몰입이 더 잘 된다.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6살 자녀와 함께 작품을 관람하러 온 박모 씨(30대)도 “다른 영화 볼 땐 조용히 있어야 해서 아이랑 같이 영화를 보는 게 어려웠는데 이건 노래도 따라 부르고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라며 “오랜만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팬덤 겨냥 콘텐츠로 활로 모색
최근 극장가는 업황 부진이 계속되는 상황. 영화 제작 비용은 크게 늘었지만 수요가 OTT로 빠져나가면서 화려한 출연진과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상업영화조차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쉽지 않다. 여기에 티켓 가격 인상이 오히려 관객 이탈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상영 후 조금만 기다리면 OTT를 통해 손쉽게 작품을 볼 수 있는 만큼 비싼 돈을 내고 극장을 찾을 유인은 점점 줄고 있다.CJ CGV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은 23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줄었고 당기 순손실 287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국내 사업에서만 56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으며 매출도 1962억원으로 전년보다 6.3% 감소했다. 회사는 대작 라인업 부족 및 인력 효율화에 따른 일회성 비용 증가로 적자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영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친 메가박스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적을 거뒀다. 콘텐트리중앙이 운영하는 메가박스는 올 3분기 영업이익 27억원을 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매출도 78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3% 증가했다. 콘텐트리중앙 관계자는 “‘프랑켄슈타인’ 등 공연 실황 콘텐츠 확장과 애니메이션 ‘귀멸의칼날’ 굿즈·프로모션 상품 판매 호조로 평균티켓가격(ATP), 평균매점매출(CPP)이 전년보다 각각 11% 증가했다”고 귀띔했다.
극장 수가 가장 많은 CGV는 임대료와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이 커 흥행작이 나와도 수익 개선이 제한적이다. 상영관 규모가 크다 보니 관객 수가 늘어도 비용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메가박스는 비교적 고정비 부담이 적은 데다가 공연·애니메이션 등 팬덤형 콘텐츠를 이전보다 더 강화한 것이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이에 업계에서는 팬덤을 겨냥한 체험형 콘텐츠 확대가 극장 산업의 사실상 유일한 돌파구라는 분석이 나온다. 케데헌 싱어롱뿐 아니라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의 극장 생중계도 인기를 끌었다. 상영작 가운데에선 지난 8월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개봉 후 두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박스오피스 6위에 오르고 누적 관객 수 560만명을 돌파하는 등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공연 실황 콘텐츠가 영화관에서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으로 등장했다가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라며 “특히 귀멸의칼날, 체인소 맨 등 팬덤이 강력한 작품인 경우에는 관객들이 단순히 일회성 관람에 그치지 않고 다회차 관람, 굿즈 구매 등 콘텐츠를 적극 소비하는 모습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