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상 소식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마감 못한 원고를 붙잡고 '이번에는 펑크를 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이었어요. 전화를 끊은 뒤 얼떨떨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책상에 앉으니 막혀 있던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라 시를 매듭지을 수 있었어요. '응원과 격려를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습니다."
신해욱 시인은 10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3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기자 간담회에서 "혼자 외롭게 시를 쓰고 있지만 누군가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했다"며 "말에 대한 개인적 탐닉으로 시작해 시 쓰는 일은 내가 공동체 일원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신 시인은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생물성> <syzygy> 등을 냈다.
"시를 시작할 때는 말을 탐닉하는 개인적 욕구로 시작하지만 시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한정적 감각과 경험, 시대적 이념이 늘 달라붙어 있죠. 시 쓰는 일은 내가 공동체 일원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작업 같아요. 이 상은 세계에 더 깊이 연루되고 책임감을 가지라는 신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총 상금 2억원' 국내 최대 종합 문학상
제33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은 △시 부문은 신해욱의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소설 부문은 이기호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희곡 부문은 주은길의 '양떼목장의 대혈투' △번역 부문은 김지영이 영역한 천명관의 <고래>다.
교보생명 산하 대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대산문학상은 국내 최대 종합 문학상이다. 시·소설·희곡·평론·번역 등 5개 부문에서 수상작을 선정한다. 상금은 부문별 5000만원씩, 총 2억원을 시상한다.
올해 소설과 시 부문은 2024년 8월부터 2025년 7월까지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쳤다. 희곡과 평론 부문은 격년제로 심사한다. 희곡은 지난 2년간 발표된, 번역은 지난 4년간 영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 중에 선정했다.
수상 작가들은 대산문화재단과의 개인적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1999년 등단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광주대 문예창작과에서 후배 작가를 양성하고 있는 이 작가는 "과거 데뷔 4년차에 아무런 청탁 없이 혼자 끙끙대며 단편소설을 썼는데 대산창작기금 덕에 그 소설들을 모아 첫 책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돈을 종잣돈 삼아서 결혼도 했습니다.(웃음)" 이 작가는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으로 최근 허균문학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역대 최연소'·부부·모녀 수상자 탄생
올해 대산문학상 수상자들은 역대 최연소 수상자, 모녀 수상, 부부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신 시인은 2019년 시 부문으로 수상한 이장욱 문학평론가와 부부 사이다. 김 번역가는 2002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1세대 번역가' 유영란 번역가의 딸이다.
미국 현지에서 출판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김 번역가는 서면 수상 소감을 통해 "수상은 놀랍지만 천명관 작가의 <고래>로 수상한 건 놀랍지 않다"며 "제가 한 일은 천명관 작가가 터놓은 길을 재포장한 것으로, 원작이 워낙 우수해 번역작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과거 영역 작품으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등이 있다.
희곡 부문을 받은 주 작가는 1994년생으로 대산문학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 202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수상작은 직접 쓰고 연출했다. 희곡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얼룩말과 양들에 빗대 현대인의 고립감과 좌절감을 그린 우화로, 2023년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해 광진구 일대에서 발견된 얼룩말 '세로'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다.
"말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인류 책임 고민"
올해 시, 소설, 희곡 부문 수상작들은 공통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존재'와 그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다뤘다.
이 작가는 "수상작은 5년간 붙잡고 있으면서 '제대로 쓰는 게 맞나' 불안함을 느꼈다"며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방향은 '말하지 못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개별적 역사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쓰면 쓸수록 '그 존재들에 대해 내가 뭘 알지? 얼마나 알길래 그들의 역사를 쓸 수 있지?' 회의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락 말했다. "이번 책을 쓰면서 책가의 책무란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대해 좀 더 성찰하는 게 아닐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신 시인은 "시는 보이지 않는 존재, 가시화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하면 목소리나 움직임의 형태로 포착해낼 수 있나 생각하는 일"이라며 "이런 존재들이 보일 수 있는 '소실계'라는 자리를 최근 중요한 문학적 화두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차기작에 대한 고민도 이런 화두와 이어져 있다. 주 작가는 "최근에는 '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며 "최근 조류 충돌 사고가 많은 걸 보면서 기후위기와 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심사를 통해 한국문학의 결이 다층적이고 풍성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올해 대산문학상 시상식은 12월 5일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다. 수상자에게는 부문별 상금과 함께 대산문학상 고유의 상패인 양화선 조각가의 청동 조각 작품 '소나무'가 수여된다. 수상작은 대산문화재단의 2026년도 번역지원 공모를 통해 해외 독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