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에 따른 세계 각국의 군비 경쟁이 소비자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른바 ‘군수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포탄 제작으로 잉크 원료 부족
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북미인쇄잉크제조사협회(NAPIM)가 지난 7월 긴급 성명을 내고 "산업용 나이트로셀룰로스(NC) 공급이 군사용 우선 배정으로 북미 시장 전반에서 NC 관련 제품의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다"고 밝혔다. NAPIM은 이런 상황이 인쇄·포장 산업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인쇄용 잉크와 코팅제의 핵심 원료다.세계 최대 잉크 제조사인 썬케미컬과 플린트 그룹 역시 가격 인상을 공식화했다. 두 회사는 지난 7~8월을 기점으로 나이트로셀룰로스가 포함된 모든 제품의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군수용 수요 확대와 원자재 확보 경쟁이 겹치면서 NC 가격 상승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이트로셀룰로스(NC)는 포탄을 발사하는 추진제의 핵심 원료다. 인쇄 잉크와 고급 도료 생산에 필수인 화학 소재이기도 하다. 최근 이 물질의 공급망이 한계점에 다다르면서 관련 산업 전반에 연쇄적인 충격파가 퍼지고 있다. 군수 산업에서 NC 수요가 급증하면서 민간용 공급이 크게 줄었다.
‘군수 인플레이션’을 촉발한 트리거는 글로벌 안보 환경의 급격한 악화라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각국은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지난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은 사상 최대치인 2조 718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9.4% 증가한 수치다. 냉전 종식 이후 가장 가파른 연간 상승률이다.

SIPRI의 샤오 량 연구원은 “100개국 이상이 2024년 군사비를 늘렸다"며 "이는 안보 환경의 악화를 반영하는 명백한 신호이며, 경제·사회적 상쇄 비용이 장기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지출이 급증했다. 미국은 9970억 달러를 지출하며 나토 전체 지출의 66%를 차지했다.
군비 증강의 중심에는 155mm 포탄의 대량 확보 경쟁 치열하다는 분석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해당 무기의 중요성이 확인되면서다. 각국은 사실상 '전시 경제 모드'로 돌입해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있지만 수십 년간 축소된 생산 기반으로는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상황이다.
미 육군은 155mm 포탄 생산량을 월 10만 발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지난 6월 기준 월 생산량은 약 4만 발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 버지니아주 래드퍼드 육군 탄약 공장에는 나이트로셀룰로스(NC) 국산 생산 라인을 포함한 대규모 증설이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EU는 '탄약 생산 지원법(ASAP)' 프로그램을 통해 5억 유로의 초기 자금을 투입했다. 올해 말까지 연간 200만 발의 포탄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대비 약 7배에 달하는 생산량 증가다.
개별 기업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독일의 방산 기업 라인메탈은 올해부터 연간 70만 발의 포탄과 1만 톤의 화약 생산 능력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폴란드 국영 방산 그룹 PGZ 역시 6억 6,300만 달러를 투입해 155mm 포탄 생산량을 최대 18만 발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나이트로셀룰로스 병목 현상 심화
포탄 생산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장은 화학물질 공급망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 중심에 있는 나이트로셀룰로스(NC)는 승패를 좌우할 전략 물자다. 민간 산업의 생사를 가를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면화나 목재 펄프에서 얻은 셀룰로스를 질산과 황산으로 처리해 만드는 물질이다. 그 자체로 인화성·폭발성이 높아 생산 설비 증설에는 엄격한 규제와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것이 공급 병목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다.나이트로셀룰로스(NC)는 대표적인 ‘이중 용도’ 소재로 꼽힌다. 군수 분야에서는 에너제틱 등급으로 분류돼 포탄이나 로켓의 추진장약 핵심 원료로 쓰인다. 민간 산업에서는 산업용 등급으로 분류돼 인쇄 잉크, 도료, 필름, 플라스틱 등 다양한 제품의 결합제 역할을 한다.
문제는 두 용도의 생산 기반이 완전히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군수용과 산업용 NC는 원료와 생산 설비를 상당 부분 공유한다. 이 때문에 한쪽의 수요가 급등하면 다른 한쪽의 공급이 줄어드는 구조적 한계를 가진다. 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과 같은 생산 체계를 형성한다.

최근 각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군수용 생산을 최우선 순위로 지정하면서, 제조사들은 더 높은 수익성과 안정적인 계약이 보장되는 군수 부문으로 생산 설비를 전환하고 있다. 그 결과 산업용 NC는 후순위로 밀려나 공급이 급감했다. 이를 경제학적으로는 ‘구축 효과’라고 부른다. 안보 중심의 자원 배분이 민간 산업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런 공급난은 곧바로 민간 제품의 가격 인상 도미노로 번졌다.
NC 공급망은 상류로 갈수록 지정학 변수에 더 민감해지는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냈다. NC의 핵심 원료인 ‘면린터(cotton linter)’ 조달에서 유럽 방산업계는 중국 의존도가 높다는 지적이 나왔다. 라인메탈의 아르민 파퍼거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유럽이 사용하는 면린터의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정학적 이유로 중국이 수출을 통제할 경우 유럽의 포탄 생산라인이 멈출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의 NC 부족은 중간 공정에서 설비 병목으로 가시화됐다. 하지만 원료 조달 단계에서 중국 의존도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지적이다. 유럽 방산업계는 중국산 면린터·NC에 대한 높은 수입 의존을 공급망 리스크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다.
민간 산업의 연쇄 충격
군수 산업의 나이트로셀룰로스 독식은 다양한 산업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타격은 인쇄·포장 산업에서 나타났다. 식품, 의약품, 생활용품 등 거의 모든 소비재 포장에 쓰이는 솔벤트 기반 잉크는 나이트로셀룰로스(NC) 의존도가 높다. 잉크 가격이 오르면 포장재 원가가 상승하고, 이는 결국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된다. ‘군수 인플레이션’이 ‘포장재 인플레이션’으로 번진다.자동차 보수용 도료 시장도 타격을 입었다. 사고 차량 수리나 튜닝 과정에서 사용되는 래커 계열 도료는 빠른 건조 속도와 우수한 작업성 때문에 NC를 핵심 원료로 사용한다.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은 자동차 수리 비용 상승으로 직결될 수 있다. 고급 가구나 악기 마감에 사용되는 고광택 래커 역시 NC를 주성분으로 한다. 이는 건설 및 인테리어 시장의 원가 압박을 가중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 자본과 방산 기업들은 공급망의 핵심 병목 지점, 즉 '생산 수단' 자체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의 새로운 투자 테마는 단순 방산주를 넘어, 나이트로셀룰로스에서 추진장약, 폭약에 이르는 '에너제틱 공급망(Energetic Supply Chain)'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자본 시장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K방산 앞세운 한국도 영향
최근 유럽에서는 해당 공급망 관련 대규모 인수합병(M&A)이 연이어 성사됐다. 라인메탈은 100년 역사의 민수용 NC 제조업체 하겐도른-NC를 인수했다. 라인메탈은 인수 직후 생산 라인을 군용 등급으로 전환할 계획을 공식화했다. FT는 "수개월 내 민수 고객 공급 중단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방산 기업 '체코슬로바키아 그룹(CSG)'은 공격적인 M&A를 통해 탄약 공급망의 강자로 떠올랐다. CSG는 지난 5월 미국 IFF 소유의 독일 발스로데 NC 공장 인수를 완료했다. 얀 마리노프 CSG 국방 부문 CEO는 “에너지용 나이트로셀룰로스 생산은 나토와 EU 국가 및 동맹국의 안보에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며 "유럽은 이런 전략 상품을 수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체코의 '총기 명가' 콜트 CZ 그룹은 유럽의 NC 생산업체 신테시아의 지분 51%를 인수하는 계약을 지난 8월 체결했다.
K-9 자주포 등을 앞세워 세계 방산 시장의 강자로 떠오른 K-방산에 현 상황은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라는 분석이다. 한국 정부와 산업계가 K-방산의 성공을 위해 NC 공급을 우선 확보할 경우 페인트·잉크 산업은 원료 부족으로 고사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한정된 자원을 두고 국가적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어려운 정책적 과제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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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