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정 확장과 금융 완화로 ‘아베노믹스 2.0’을 예고한 다카이치 사나에가 일본 총리에 오른 뒤 도쿄 증시는 강세, 엔화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다카이치 트레이드’다. 하지만 과거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추진된 아베노믹스가 현재 인플레이션 국면인 일본 경제에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닛케이 지수 사상 최고…엔화는 추락
다카이치는 10월 21일 중의원(하원) 임시의회에서 열린 총리 지명 선거 1차 투표에서 465표 중 절반을 웃도는 237표를 얻어 104대 총리에 올랐다. 다카이치는 10월 4일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지만 26년 동안 연립정권을 이룬 중도보수 성향의 공명당이 정치자금 규제 관련 견해차를 이유로 연정을 이탈해 총리 선출이 불투명했었다. 그는 총리 지명 선거 전날 오사카 기반 우익 성향인 제2야당 일본유신회와 연정 수립에 성공하며 총리에 지명됐다.
혼슈 서부 나라현 출신인 다카이치는 고베대 경영학부와 마쓰시타정경숙을 졸업했다. 마쓰시타정경숙은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가 일본을 이끌 리더를 키우기 위해 1979년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다카이치는 미국 연방의회 등을 거쳐 1993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의회 입성’ 동기다. 이후 ‘유리천장’을 깨며 강경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그는 아베 전 총리의 정책 노선을 계승해 ‘여자 아베’로도 불린다.
다카이치가 총리에 등극한 첫날 닛케이 지수는 전날 대비 0.27% 오른 4만9316에 마감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10월 27일에는 5만512에 장을 마치며 처음으로 5만 선을 돌파했다. 증권업계는 “다카이치가 재정 확장과 금융 완화를 추진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며 일본 주식 매수세가 확산했다”고 분석했다.
다카이치 시대 엔·달러 환율은 상승세다. 엔화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9월까지 달러당 140엔대 후반에서 거래된 엔화는 10월 들어 줄곧 달러당 15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정책에선 ‘비둘기파’로 여겨지는 다카이치 총리 선출로 일본은행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커지자 엔 매도세가 확산했다.
그러나 아베노믹스 2.0은 일본 소비자물가가 2% 이상 상승세를 이어가는 국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돈 풀기’ 정책이 물가를 더 자극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다카이치가 취임 후 물가 대책을 최우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베노믹스 망령과 결별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 신문은 “현재 경제 상황은 아베노믹스 도입 때와 다르다”며 “대처해야 할 것은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동력과 원자재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적극 재정으로 수요를 늘리면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카이치가 적자 국채 발행까지 용인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뒤 국채금리도 들썩이고 있다. 최근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1.700%를 기록하며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재정 악화 우려에 시장이 일본 국채를 외면하면서다. 작년 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36.7%로 세계 최고다.
“GDP 대비 방위비 2% 연내 달성”
‘강한 일본’을 내건 다카이치는 안보와 관련해선 GDP 대비 방위비를 연내 2%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애초 2027년까지 달성하려던 계획을 2년 앞당기는 것이다. 다카이치는 공격용 무기 수출과 핵잠수함 보유까지 구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방위비 증액 압박, 북·중·러의 군사 위협에 대응해 ‘군사 대국화’에 나서면서 동아시아 안보 지형이 급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카이치는 10월 21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안보 관련 3개 문서의 개정 지시를 내리고 싶다”며 “재검토 작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2022년 책정된 안보 3문서는 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 등 세 가지 문서로 구성된다. 방위력정비계획은 2023~2027년 방위비를 43조 엔 수준으로 잡고 있다. 방위성은 2027년 방위비가 GDP 대비 2% 수준을 달성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올해 방위비는 GDP의 1.8% 수준이다.
다카이치는 수출할 수 있는 방위장비 품목도 늘릴 계획이다. 지금은 구난, 수송, 경계, 감시, 소해(바다 기뢰 등 위험물 제거) 등 다섯 가지 목적에 맞는 방위장비만 수출할 수 있는데 공격용 무기 수출 길도 열겠다는 것이다. 반격 능력을 높이기 위해 차세대 동력을 활용한 잠수함 보유도 추진한다. 핵잠수함을 염두에 뒀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전쟁 포기’ 조항인 헌법 9조 개정까지 협의할 방침이다. ‘전쟁 가능 국가’로 전환을 꾀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다카이치의 방위력 강화 추진은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전후(戰後) 가장 어렵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특히 북·중·러에 대응해 억지력을 높이겠다는 생각이다. 다카이치는 10월 22일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곧바로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에게 필요한 정보 수집·분석을 지시했다.
미·일 ‘희토류 동맹’에 조선 협력도
다카이치는 10월 28일 도쿄에서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갖고 방위력 강화 방안 등을 설명했다. 트럼프는 “일본이 방위력을 대폭 강화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매우 큰 규모의 신규 군사장비 주문을 수주했다”며 일본의 미국산 무기 주문 사실을 공개했다. 다카이치의 ‘군사 대국화’ 행보를 측면 지원한 모양새다.
트럼프는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가 포함된 미·일 무역 합의에 대해선 “매우 공정한 합의”라고 자평했다. 일본 측에서 나올지 모르는 협상안 수정 요구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발전, 파이프라인 등 리스크 제로 인프라에 자금을 투입할 것”이라고 했다.
미·일 정상은 회담 이후 핵심 광물과 희토류의 안정적 공급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를 예고하자 미·일이 ‘희토류 동맹’을 강화한 것이다. 두 정상은 양국 무역 합의 사항을 착실히 이행한다는 내용의 문서에도 서명했다. 정상회담에 맞춰 양국 정부는 조선업 분야 협력 각서도 체결했다. ‘일본판 마스가(MASGA)’다.
일본 정부는 미·일 투자 공동 팩트시트까지 공개했다. 일본 기업이 관심을 보이는 미국 사업 목록은 에너지, 인공지능(AI)용 전력 개발, AI 인프라 강화, 핵심 광물 등 네 가지다. 일본 기업의 투자 후보인 이들 사업 규모는 총 4000억 달러에 이른다. 가장 큰 프로젝트는 웨스팅하우스의 원자로 관련 사업으로 1000억 달러 규모다.
다카이치 내각 출범 직후 지지율은 호조세다. 요미우리신문이 10월 21∼22일 1057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에서 다카이치 내각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71%에 달했다. 이 신문이 역대 내각 출범 직후 시행한 조사 기준으로 2006년 아베 신조 1차 내각(70%)을 웃돌아 5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9년 75%의 지지율로 출발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8개월여 만에 퇴진했다. 2020년 지지율 74%로 스타트한 스가 요시히데 내각은 1년여 만에 물러났다. 높은 지지율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전망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무리한 정책 추진은 다카이치 정권의 기반 약화를 초래할 소지도 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