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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을 설득하라, '흑백요리사'와 국제중재 [한민오의 국제중재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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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을 설득하라, '흑백요리사'와 국제중재 [한민오의 국제중재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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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 2가 올해 12월에 방영된다. 시즌 1의 인기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단했다. 요리 프로그램 같지만 그 본질은 스포츠 경기가 아닐까 싶다. 참가자들이 같은 룰에 따라 정해진 시간 내에 요리를 만들고, 심사위원의 승리 판정을 받아야 하는 게임. 여러 제약을 뚫고 매회 극적으로 승자가 나온다. 긴장하며 지켜보는 시청자에게도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불꽃 튀는 국제중재 심리기일들이 떠올랐다. 두 가지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국제중재는 당사자들이 중재판정부를 직접 구성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법원 소송과 많이 닮아 있다. 양측이 치열하게 한판 승부를 겨뤄 심판, 즉 중재판정부가 승자를 가리는 구조다.
    우선, 재료 : 문서 수만 건과 유머 한 스푼
    맛있는 요리는 가장 신선한 재료들을 고르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주재료 하나 잘 고른다고 최고의 한 접시가 나오지는 않는다. 같이 곁들이는 부재료를 잘 선택해, 부재료들이 주재료를 받쳐줘야 한다. 각 재료들은 자기 맛도 내는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도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 재료의 선택, 그리고 재료의 적절한 배합에는 요리사의 센스와 경험이 모두 들어간다.

    국제중재도 재료를 고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심사위원들이 맛볼 근사한 요리는 중재판정부에 전달할 ‘스토리’다. 재료는 상거래를 할 때 오가는 수천~수만 개의 문서다. 가장 적절한 문서 수백여 개를 골라 주장 서면에 맛있게 배치하는 것이 국제중재 변호사들의 중요한 업무다.


    이 엄선된 문서들을 ‘서증’이라고 부른다. 문서로 된 증거라는 뜻이다. 그중에서 다시 가장 중요한 문서 수십여 개를 골라 심리기일 때 구두로 선보인다. 이때 어떤 문서를 고르느냐도 중요하지만, 이 문서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치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진검 승부는 구두 변론을 하는 심리기일 때 펼쳐진다. 심리기일 첫 발언은 무엇으로 할지, 중재판정부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관건이다. 직관적인 헤드라인을 뽑아 마음에 와닿는 테마를 처음에 제시해야 한다. 카피라이터의 숙명과 비슷하다. 너무 밋밋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자극적이기만 해도 안 된다. 자극적이기만 한 것은 쉽게 질리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첫 문장을 말한 후에는 주로 시간순으로 문서를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뻔하면 지루하고, 너무 예측 불가하면 몰입이 안 될 수 있다. 어느 문서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기에서 승으로, 승에서 전으로 넘어갈지 판단한다. 거기에 양념으로 유머 한 스푼을 넣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 국제중재 심리기일 현장이다.
    다음, 조리 : 지지고 볶는 반대신문
    대부분의 요리에는 불이 사용된다. 그 불을 통해 재료들 간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열기는 기름으로도, 물로도, 공기로도 가할 수 있다. 다양한 조리 과정을 통해 재료의 질감, 맛, 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국제중재도 못지않게 다이내믹하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는 보통 양측이 약 2시간씩 ‘모두진술’을 한다. 양쪽 변호사가 각자의 입장을 한 편의 영화처럼 설명하는 시간이다. 그 후 며칠간, 때로는 몇 주씩 증인과 전문가에 대한 반대신문이 이어진다. 반대신문이야말로 국제중재 심리기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은 심리기일 중에 증인으로 나온 상대방 엔지니어를 반대신문할 일이 있었다. 사건은 상대방 회사 제품에 예상치 못한 큰 하자가 발생해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을 청구하는 건이었다. 그 엔지니어는 증언 중에도 자사 제품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지금과 같이 제품에 하자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도 못했고, 그런 일을 겪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하자가 발생했으니 보험금으로 처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 보험사를 대리했다. 그런데 이 엔지니어의 증언을 가만히 들어보니, 상대방 기술전문가가 낸 전문가 의견서, 그것도 의견서 별첨에 들어간 표와 내용이 맞지 않았다. 전문가 의견서 맨 뒷장에 첨부된 표를 보니, 상대방 회사는 최근에 같은 기종의 물건을 20차례나 리콜한 이력이 있다고 정리돼 있다. 회사는 전문성이 있다고 기술전문가가 과하게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 기술전문가가 그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사실증인인 엔지니어와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점에 착안해 우리는 이 부분을 비집고 들어갔다.

    “증인, 기술전문가의 의견서를 읽어본 적 있지요? 의견서 별첨으로 들어간 이 표를 본 적이 있지요? 이 표에 있는 내용은 회사에서 데이터를 전문가에게 제공한 것이지요? 이 표에 있는 내용은 그렇다면 사실이네요? 이 표를 보면 동일 기종으로 최근에 같은 하자 건이 20번도 넘게 일어났는데, 맞죠? 심지어 회사에서는 대규모 리콜까지 진행했죠? 그런데도 본건에서는 그 하자 발생 위험에 대해 보험사에게 한 번도 알린 적이 없죠?”

    우리가 상대방 사실증인을 그야말로 지지고 볶았다. 영어에서도 이를 ‘grilling the witness’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역시 요리와 소송은 세계 어디서나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나 보다.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 증언과 문서의 허점
    생선 요리를 다 잘했는데 마지막으로 가시가 하나 나오면 큰일이다. 그러니 재료 선정과 조리를 잘했어도, 마무리 프레젠테이션이 잘되지 않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국제중재도 마찬가지다. 증인이나 전문가의 증언이 앞뒤가 잘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은 국제중재 사건에서 상대방 손해사정 전문가를 반대신문하게 됐다. 우리 의뢰인은 한국 하도급업체, 상대방은 외국 시공사였다. 우리 의뢰인이 납품한 철골 구조물에 하자가 있어 그 하자를 고치느라 손해를 많이 입었다는 게 상대방의 주장.



    그런데 상대방의 손해사정 전문가가 ‘손해’라고 주장한 내역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내역들이 눈에 띄었다. 상대방 시공사 쪽의 감리 업체에서 그 하자를 수리하는 동안 유흥주점에서 지출한 비용이 회계 전표에서 발견된 것. 그 손해사정 전문가에게 물었다.

    “여기 ‘사과’라는 업체명은 무엇이죠? 제대로 확인을 하였나요? 제가 검색을 해보니 공장 근처 유흥주점이라고 나오는데, 알고 있었나요? 이 비용을 손해라고 보고 손해 항목에 포함시킨 것이죠?”

    다음날 아침, 상대방 손해사정 전문가가 의견서 수정본을 제출했다. 이상한 내역들을 발라내서 금액을 낮춘 것이다. 그런데 중재판정부는 이미 전날 생선 가시를 목도했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엉뚱한 비용 내역들을 포함시켜 손해배상청구를 한 것이 밝혀진 상태에서 뒤늦게 생선 가시를 도려내도, 그 음식을 맛있게 먹기란 쉽지 않다. 결과는 우리 의뢰인의 대승. 중재판정부는 그 사건에서 상대방의 손해 주장을 크게 배척했다.
    결국, 심사위원 : 판정부를 설득하라
    결국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소송에서는 판결로 결과를 확인하는데, 마찬가지로 국제중재는 중재판정에서 승부가 판가름 난다. 그런데 심사위원, 그러니까 중재인은 안성재 셰프 같은 사람도 있고, 백종원 대표 같은 사람도 있다. 각자 개성이 조금씩 다르다.

    대부분의 국제중재 사건은 싸움이 회색지대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면 이쪽 주장이 맞는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쪽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중재인들은 각자 국적이나 익숙한 법체계가 다르다. 소금 간 하나로 합격·불합격을 가르는 안성재 셰프처럼, 결정적인 사실관계 하나로 중재인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중재인들이 각자 예민한 지점이 다르다 보니, 모두를 100% 만족시키는 변론은 어렵다.



    흑백요리사에서는 결국 기본에 호불호가 없는 충실한 맛있는 요리가 이긴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먹어보았을 때 대체로 익숙한 맛이 나고 그걸 균형 있게 잘 조리하는 게 승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거기에 약간의 독창적인 요소를 덧입히면 금상첨화다. 국제중재에서도 기본에 충실한 스토리를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관계와 법리를 잘 정리한 이야기, 즉 기본이 충실한 스토리가 출발점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를, 사실관계에 기반해 구성하고 전달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프랑스 요리 기법을 동원하거나 일식 주방에서 수십 년 일을 했다고 반드시 게임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재료를 한국식으로 풀어낸 ‘이모카세’가 이기고, 무명의 요리사가 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셰프들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연마를 한다.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재료 선택과 재료 손질을 어떻게 해서, 어떤 레시피로 이븐(even)하게 요리를 구워내고, 어떻게 하면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마음에 와닿게 할지 ? 국제중재 변호사는 늘 이와 결이 비슷한 고민들을 한다. 이 고민은 사람 마음에 관한 것이므로, 아마도 끝이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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