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중순, UNFCCC 감독기구가 파리기후변화협약 제 6.4조 하의 첫 방법론을 승인하면서 글로벌 탄소시장은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교토의정서 시대의 CDM(청정개발체제)이 2006년부터 2020년까지 7800여 개 프로젝트를 등록했다면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Article 6.4 메커니즘, 일명 PACM(Paris Agreement Crediting Mechanism)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동안 투기성 자산으로 취급되던 탄소 크레디트가 드디어 표준화된 금융자산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탄소 크레디트, 어떻게 바뀌나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크레디트의 ‘질적 차별화’다. ICVCM이 운영하는 CCP(Core Carbon Principles) 라벨을 받은 고품질 크레디트는 일반 크레디트보다 최대 4배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UNFCCC 감독기구의 승인 방법론으로 인증된 탄소 크레디트는 AAA 등급 채권처럼 간주되는 반면, 그렇지 않은 크레디트는 정크본드로 여겨진다.
탄소시장에도 명확한 품질 기준이 생긴 셈이다. 10월 1일 ICVCM은 6개 공학적 CDR(탄소제거) 방법론에 CCP 승인을 부여했다. 골드 스탠더드의 콘크리트 탄산화, 이소메트릭의 바이오매스 지질 저장, 바이오오일 저장, 직접공기포집(DAC) 등이 포함됐다. 현재 이 방법론으로 발행된 크레디트는 3만 개에 불과하지만, 향후 연간 320만 개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7월에는 바이오차 관련 3개 방법론도 승인됐다. 투자자들은 이제 검증된 고품질 크레디트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Article 6.4의 핵심은 ‘이중계산 방지’와 ‘투명성 강화’다. 새로 승인된 첫 방법론은 개발도상국의 소규모 풍력 및 태양광발전 사업을 대상으로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개도국의 재생에너지 보급이 2030년까지 3배 확대되어야 탄소중립 목표와 부합한다고 밝혔다. Article 6.4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감축 사업에 투자하고 그 성과를 ITMO(국제적으로 이전된 감축 성과) 형태로 자국의 감축목표에 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과거 CDM의 가장 큰 문제였던 이중계산 논란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 같은 환경 변화 속에서 아시아 시장의 움직임은 발 빠르다. 싱가포르는 이미 9건의 Article 6 협정을 체결하며 지역 탄소시장 허브로 자리 잡았다. 9월 16일 체결된 싱가포르·베트남 협정은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한다.
베트남의 탄소감축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성과를 싱가포르가 상응조정(corresponding adjustment) 형태로 인수하되, 수익의 5%는 베트남의 기후 적응 재원으로, 2%는 첫 발행 시 폐기해 글로벌 순감축에 기여하도록 설계됐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 기업들은 과세 배출량의 최대 5%를 상쇄할 수 있다. 한국 투자자들은 이 경로를 통해 검증된 고품질 크레디트에 접근할 수 있는 창구를 확보한 셈이다.
중국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 국무원은 8월 2027년부터 일부 산업에 절대 배출 한도를 도입하고, 2030년까지 은행의 탄소시장 직접 참여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국의 금융기관들이 시장에 진입하면 유동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LSEG의 쉬에완 첸 애널리스트는 “정책입안자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표준협회는 10월 6일 UNFCCC로부터 국내 최초의 Article 6.4 지정운영기구(DOE)로 승인받았다. 이로써 타당성평가(validation), 검증·인증(verification·certification), 지속가능발전 요건 확인 등 Article 6 기반 국제감축사업 전반에 대한 서비스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문동민 한국표준협회 회장은 “이번 승인은 한국 산업이 파리협정 체제하 글로벌 탄소감축 시장에서 신뢰성 높은 감축 실적을 창출할 수 있는 초석”이라고 밝혔다. 한국 기업들이 향후 Article 6.4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거나 해외 감축 사업에 투자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투자자 관점의 변화 주목
투자자 관점에서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첫째, 포트폴리오 다각화의 새로운 자산군이 탄생했다. 탄소 크레디트는 전통적 주식이나 채권과 상관관계가 낮아 리스크 분산 효과가 크다. 둘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에 대한 Anti-ESG 바람이 거센 요즘, Article 6.4는 ‘진짜 ESG’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표면적인 그린워싱과 실질적 탄소감축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세계은행이 6월에 발표한 〈State and Trends of Carbon Pricing 2025〉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전 세계 배출량의 28%가 탄소가격제의 적용을 받고 있으며, 2024년 세입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전력 부문은 51%, 산업 부문은 43%의 적용률을 보인다. 지난 10년간 적용 범위가 12%에서 28%로, 세입은 3배 증가했다. 탄소비용의 현실화는 고품질 크레디트의 가치를 더욱 높일 것이다.
한국 투자자와 금융기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첫째, 해외 감축 사업 직접투자다. 한국표준협회의 DOE 승인으로 한국 기업들은 개도국의 재생에너지, 산림 복원, CDR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고 Article 6.4 크레디트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Article 6 기반 탄소 펀드 조성이다. 싱가포르가 체결한 9개 협정을 활용하면 검증된 크레디트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 셋째, CCP 라벨 크레디트 매입이다. ICVCM이 승인한 방법론으로 생성된 크레디트는 일반 크레디트보다 3.8배 높은 가격에 거래되지만, 그만큼 품질이 검증됐다. 넷째, 탄소시장 인프라 기업 투자다. 탄소 측정·검증·보고(MRV) 솔루션, 탄소회계 플랫폼, CDR 기술 기업들이 수혜를 볼 전망이다.
물론 리스크도 있다. 방법론 승인이 시작 단계인 데다 산림·농업·산업 부문 방법론은 여전히 개발 중이다. 일부에서는 탄소거래가 자국 내 감축 노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세계은행은 “탄소가격제는 국가들이 배출을 줄이고, 국내 수입을 늘리며, 녹색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는 강력한 도구”라고 강조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탄소시장은 불투명한 장외거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번 Article 6.4의 승인은 이 시장을 투명하고 표준화된 금융시장으로 진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23년 20억 달러에 불과하던 자발적 탄소시장이 2030년에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CDM 시대에는 7800개 프로젝트가 20년에 걸쳐 등록됐다면, Article 6.4 시대에는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2030년까지 1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이 시장에서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투자자들은 새로운 기회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탄소시장의 게임 법칙이 바뀌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다.
김준섭 KB증권 ESG리서치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