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자(1924~2015)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 화가였다.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로 펼친 그의 화풍은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네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라는 파란만장한 삶, 화려한 패션 센스, 탁월한 말과 글 실력이 더해졌다. 천경자의 삶은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강인하면서도 어떤 비밀이나 한(恨)을 품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여성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했고, 천경자의 그림이 걸린 전시장은 늘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1991년 벌어진 ‘미인도 위작 사건’이 모든 걸 바꿨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두고 천 화백은 “내 그림이 아니다”고 했다. 미술관은 진품이라며 맞섰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사법부가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결론 내린 뒤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천 화백은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관련 논쟁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천 화백을 언급하거나 재조명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진 탓에 그는 점점 대중에게 잊혀갔다.
◇10주기 맞아 본격 재조명
서울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는 천경자 사후 사실상 처음으로 작가를 제대로 조명하는 전시다.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미인도 위작 사건은 천경자의 삶과 예술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이로 인해 작가의 업적 자체가 잊히는 상황이 안타까웠다”며 “전시를 말리는 이들도 많았지만,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10주기를 맞아 전시를 열었다”고 했다.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채색화만 해도 80여 점에 달한다. 화가 업적에 집중하기 위해 논란의 중심인 ‘미인도’는 포함하지 않았다. 150여 점의 삽화와 책 표지 등에 그린 표지화,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사진 등 관련 자료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의 중심은 천경자의 전성기로 꼽히는 1960~1970년대 작품이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연인이던 김남중과 1973년 헤어진 것이다. 첫 번째 남편을 전쟁통에 잃고 두 아이를 홀로 키우던 천경자는 전쟁 후 김남중을 만나 두 아이를 낳았지만, 사실 그는 유부남이었다. 오랫동안 고통받던 천경자는 마침내 그와 결별한 뒤 삶의 새로운 장을 열기로 결심했다. 화풍을 바꿨고,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으며, 홍익대 미대 교수를 그만둔 뒤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 게 1974년이다.
전시는 이 시기 그린 작품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로 문을 연다. 작가가 1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아프리카 초원에 나체의 여인이 코끼리 위에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안 이사장은 “여성의 모습은 천 화백 그 자체”라며 “천 화백이 1년 내내 이 그림 작업에만 몰두했는데, 그동안 많이 울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작품 상당수를 소장하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그를 조명하는 상설전시에 붙였던 제목이다. 그 말대로 천경자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였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기쁜 것은 매우 기쁘게, 슬픈 것은 사무칠 정도로 슬프게 감지하는 성향이었다”고 표현했다.전시장에 즐비한 천경자의 여성 초상화 작품들을 보면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체감할 수 있다. 천경자의 여성 초상화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고(孤)’를 비롯한 대부분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가족이나 주변인이 모델인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모델이다.
이 밖에도 다채로운 작품이 나왔다. 베트남 전쟁에 종군 화가로 참여해 그린 기록, 병풍에 그린 금붕어와 개구리 그림 등 천경자 작품세계의 다양한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