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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에 싸인 탐스런 천도복숭아…올여름 잔혹함도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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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에 싸인 탐스런 천도복숭아…올여름 잔혹함도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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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은 나름 잔혹했던 계절로 기억할 것 같다. 더위가 유난히 길었다. 그 계절이 잔혹했다고 생각한 진짜 이유가 있는데, 유난히 과일이 맛있지 않았다. 주변에 하소연을 좀 해봤지만 제대로 된 공감은 얻어내지 못했다.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대답을 주로 들었는데, 확실히 내 느낌은 달랐다. 참외는 무를 씹는 것 같았고, ‘딱복’ 즉 딱딱한 복숭아는 정말이지 소고기와 함께 국을 끓여 먹고 싶은 게 대부분이었다.

    과일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여름 채소인 오이조차 쓰고 맛이 없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 광고를 보고 산 오이소박이가 써서 절반 이상 버려야만 했다.


    천도를 먹어보자 확신이 들었다. 올여름은 정말 아니구나. 여름은 물론 사시사철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꼽는 천도, 단맛이 없지 않지만 균형을 잡아주는 신맛을 확실하게 갖춘 과일.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크럼블이나 갈레트 같은 밀가루와 버터 반죽을 더해 굽는 디저트에도 완벽하게 어울린다.

    다수가 최고의 여름 과일로 복숭아를 꼽는 현실 속에서 천도는 그저 이등 과일 취급을 받을 뿐이라 나처럼 맛이 예년보다 못하다고 슬퍼하는 사람도 적다. 하지만 이름을 찬찬히 뜯어보시라. 한자로는 ‘天桃’, 영어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 속 신의 음료’라는 ‘넥타’에서 파생된 과일이 바로 천도복숭아다.


    복잡하다 못해 비참한 심정으로 엘리엇 호지킨(1905~1987·영국)의 ‘흰 종이에 싸인 세 개의 천도복숭아’(1957)를 본다. 이 그림을 보고 바로 입에 군침이 돌지 않았다면 당신은 매정한 사람이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변화로 해가 다르게 과장 없이 잔혹해지는 계절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안기는 천도복숭아처럼 자잘한 낭만을 모르는 냉혈한이다.

    작가의 솜씨 덕분에 어떻게 그렸더라도 천도복숭아는 맛있게 보였겠지만 둘러싼 종이의 역할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일단 종이에 쌌다는 건 나름 고급 대접을 한다는 의미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50년대 영국에서는 천도복숭아도 복숭아처럼 귀하게 대접해 종이에 싸서 팔았을까. 기억하는 한 나는 천도복숭아가 종이에 싸여 팔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림 속 종이는 천도복숭아를 시각적으로 더 돋보이게 한다. 일단 작품 속에서 시각적 경계를 설정해 과일 자체에 더 집중하도록 돕는다. 둥글고 매끄러운 천도복숭아의 형태 및 질감에 대조를 이루는 사선과 종이의 주름으로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해준다. 일부를 가려 신비함마저 감돈다.

    가을과 함께 천도의 철은 완전히 막을 내렸지만, 이 작품을 보며 내년 여름을 기다리겠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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