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이 창간된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국내총생산)은 103달러였다.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만6000달러로 예상된다. 61년 사이 한국 국민의 소득은 350배 늘었고, 선진국에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을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올려 세운 동력은 기업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반도체, 자동차, 가전, 조선, 석유화학, 철강, 식품, 화장품, 바이오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잇따라 탄생했고, 그들이 구축한 생태계에서 일자리와 세금으로 이룬 결과다.
앞으로는 밝지 않다. 올 들어 한국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 환경이 수많은 변수와 도전에 직면해 있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관세 폭탄으로 시작된 글로벌 무역 퇴조와 주력 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의 추격 혹은 역전이 가시화하고 있다. 저출생으로 인구는 감소하는 와중에 미래 산업인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양자 등에서 미국, 중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들을 따돌리고 저 멀리 뛰쳐나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미래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 선두에 AI를 앞세운 삼성과 SK가 있다. 지난 1일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최대 100조원 규모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주를 약속했다. 오픈AI가 추진 중인 700조원 규모로 지어지는 AI데이터센터인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두 회사의 HBM이 들어간다는 얘기다.
HBM 외에도 삼성은 가전, TV, 반도체, 스마트폰 등 모든 제품에 AI를 접목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제품에 AI를 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헬스케어와 로봇 냉난방공조(HVAC) 등도 미래 산업으로 낙점하고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SK그룹은 세계 1위 HBM 제조사 SK하이닉스를 앞세워 미래를 열고 있다. 세계에서 최초로 HBM을 개발해 양산한 이 회사는 차세대 HBM인 HBM4도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엔비디아 납품을 대기하고 있다. SK의 AI 행보는 그룹을 넘어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아마존과 함께 짓고 있는 ‘울산 AI 데이터센터’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3위 완성차 제조사인 현대자동차그룹은 전기차와 도심항공교통(UAM) 로봇 등 미래 모빌리티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정의선 회장을 필두로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현대차와 기아는 하이브리드카 전기차 주행거리연장형전기차(EREV) 등 내연기관에서 탈피한 신차를 내년부터 대거 내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와 함께 자동차 브랜드에 ‘프리미엄’과 ‘고성능’을 강화하며 글로벌 톱 완성차 회사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다.
LG그룹은 AI와 바이오 클린테크 등 소위 ‘ABC’ 등을 성장산업으로 정하고 그룹 차원에서 2028년까지 50조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AI에 올인하는 분위기다. 삼성·SK와 달리 반도체 제조사가 없는 LG는 최근 엑사원이란 하이브리드 AI 모델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공개했다. 주식시장, 제조업, 바이오, 가전제품 등에 엑사원을 적용해 그룹 전체적인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HD현대와 한화는 세계 1, 2위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조선사를 앞세워 나라를 구하는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절실히 원하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나서며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이를 필두로 전력기기(HD현대일렉트릭)와 방위산업, 우주(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이 AI 시대의 수요 증가에 이미 대비를 마쳤다.
수소환원제철소로 전환하는 포스코는 주력 사업의 대전환기를 맞아 세계 석학들을 인천 송도로 불러들여 중심을 잡아줄 미래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두산은 에너지와 산업기계 반도체소재 등을 미래 먹거리로 정하고 130년 역사에 변신 DNA를 심고 있다. AI가 촉발한 에너지 수요 폭증엔 LS와 효성 등이 사력을 다해 대비하고 있다. 이들 한국 기업이 고용량의 정밀한 전력기기 및 송·배전망의 글로벌 시장 장악에 나선 것이다.
롯데와 CJ, 신세계, 현대백화점, 농심, 오뚜기, 대상, 아모레 등은 방탄소년단(BTS),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으로 이어지는 K문화를 세계 시장 확장의 기회로 삼고 도약을 마련하고 있다.
혁신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정부도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는 지적 역시 끊임없이 나온다. 기업이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혁신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미래 기술을 우리 기업이 선점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R&D)을 지원하고 정책자금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정에 형사처벌을 하는 배임죄나 주 52시간 강제화,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원자력발전 퇴출,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들의 미래 준비를 막는 규제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61년 전 최빈국인 한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 놓은 건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도전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할 때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