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파루에서 윈스럽 파루로
그렇다면 뮤지컬은 어떨까. 뮤지컬 속 장애인 캐릭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관련해 1958년 토니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을 받은 <뮤직맨>(1957)은 매우 중요하게 거론될 필요가 있다. <뮤직맨>의 배경인 가상의 마을 아이오와 리버시티 안에서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주인공 메리언 파루의 나이 어린 남동생 윈스럽 파루다. 윈스럽은 ‘s’음을 거친 ‘th’로 발음하는 리스프(lisp) 장애 때문에 내내 위축되어 있다. 친구들은 이런 윈스럽을 은근히 놀리고, 스스로도 매사에 자신이 없다. 발음 장애 때문에 ‘말을 안 하는’ 윈스럽에게는 대사도, 넘버도 매우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윈스럽은 넘버 ‘웰스 파고 마차(The Wells Fargo Wagon)’의 한 소절을 노래함으로써 서사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는 인물이 된다.
“Ho the Wellth Fargo Wagon ith a-comin’ now I don’t know how I can ever wait to thee It could be thumpin’ for thumone who is No relation but it could be thump’n thpethyul Just for me! (오, 웰스 파고 마차가 오고 있어요.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차가 나랑 상관없는 누군가의 물건을 싣고 오는 걸 수도 있지만, 그게 나만의 특별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윈스럽은 이렇게 웰스 파고 마차를 기다리며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말한다. 윈스럽이 소박하고 귀여운 욕망을 드러내는 이 소절은 신기하게도 마술적인 힘을 갖는다. 마침 웰스 파고 마차에는 해롤드 힐이 보이 밴드를 만들어 마을에 사기를 치려고 들여오는 온갖 악기가 실려 있었고 메리언은 이 사기꾼 해롤드 힐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윈스럽의 이야기를 계기로 모든 것은 변한다. 메리언은 동생에게 친절을 베푼 해롤드 힐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고 그와 연인이 되며, 이에 따라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바뀐다. 마을 사람들은 해롤드 힐이 전하는 ‘음악의 힘’으로 서로 협업하는 조화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고 그 역시 떠돌이 사기꾼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특정 지역에 발이 묶인다. 남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새로운 것을 수용할 줄 몰랐던 마을의 편견과 경직성, 미꾸라지 같았던 해롤드 힐의 원래 모습은 사라진다.

<뮤직맨>은 그래서 ‘완전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결말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별다른 분량이 없는 윈스럽의 극적 역할은 이처럼 작품의 테마와 직결될 정도로 크다. 일견 과장되고 인공적으로 보이지만 메레디스 윌슨(Meredith Willson)의 원래 의도를 알면 이해가 간다. 윈스럽은 <뮤직맨>의 대본, 가사, 작곡을 혼자 해냈던 윌슨이 관철시키고자 했던 장애인 주인공의 흔적이다. 원래 윌슨은 메리언의 동생으로 휠체어를 탄 ‘짐 파루’라는 소년을 설정했다. <뮤직맨>의 초안에서 그는 걷지도 말도 못 하는 장애인으로, 자신을 시설에 가두려 하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집 대신 학교 지하실에 숨어 지내기도 한다. 힐이 나타나 짐을 밴드에 끌어들이고 운용이 가능한 악기를 찾아주면서 이들은 마을의 편견에 도전한다. 음악에 감명을 받은 짐이 처음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낭만적 판타지로 묘사되지만 이는 윌슨이 장애인 문제를 진지하게 환기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이런 윌슨의 의도는 끝까지 관철되지 못했다. 개막을 10개월 앞둔 시점에서, 장애 소년 주인공은 연민과 감상 외에는 수용이 불가능하며 특히 뮤지컬 코미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프로듀서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을 대체한 윈스럽의 장애는 발음 장애로 현격히 축소되었지만, 그가 어눌한 발음에 개의치 않고 노래하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핵심 요소로 단단히 구축되었다. 휴 잭맨이 브로드웨이에 돌아와 공연했던 <뮤직맨> 리바이벌 버전(2022)에서는 힐이 윈스럽에게 무릎을 꿇고 코넷(cornet)을 전달함으로써 더 섬세하게 ‘웰스 파고 마차’ 장면이 연출되었다.
휠체어를 탄 에이도 애니
장애를 갖고 있는 또 다른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릭터도 있다. 청각, 시각, 언어 장애를 가진 뮤지컬 <토미>(1992)의 토미, <위키드>(2003)의 걷지 못하는 네사로즈, 목발을 짚은 뉴스 보이 <뉴시즈>(2012)의 크러치,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디어 에반 핸슨>(2016)의 에반, 희귀 유전 질환 조로증을 앓고 있는 16세 소녀 <킴벌리 아킴보>(2022)의 킴벌리 아킴보가 그들이다. 영국의 럭비 유망주였다가 사고로 척수 손상을 입은 웨스트엔드 뮤지컬 <The Little Big Things>(2023)의 헨리 프레이저도 주목된다. 가장 급진적인 캐릭터로는 2019년 <오클라호마!>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버전의 에이도 애니를 손꼽을 수 있다. 원래 에이도 애니는 비장애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프로덕션에서 다소 멍청하고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코믹 캐릭터로 그려진다. 윌 파커를 좋아하면서도 페르시안 행상인 알리 하킴의 구애를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에이도 애니는 새로운 해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캐릭터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 피시가 연출한 2019년 <오클라호마!>는 작품에 내재한 보수적 미국주의의 틀을 희석시키며 에이도 애니를 ‘휠체어에 탄 장애인 여성’으로 바꿔놓았다. 2살 때 척수 손상을 입어 가슴 아래가 마비된 장애인 배우 알리 스트로커(Ali Stroker)는 에이도 애니의 장애를 결함이 아닌 인물의 신체적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육화시켰다. 알리 스트로커가 선보인 휠체어를 활용한 안무는 에이도 애니를 성적 욕망에 솔직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변주를 통해 애니는 비로소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자신에 대해 당당하고 욕망을 표현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휠체어를 탄 에이도 애니는 브로드웨이 클래식을 생생하고 도발적인 이머시브 공연으로 변화시킨 일등 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에이도 애니의 솔로 넘버 ‘I Cain’t Say No’의 “내가 아닌 것은 내가 될 수 없다”는 가사는, 알리 스트로커에 의해 애매함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하고 명확한 애니를 보여주는 핵심 요소로 해석되었다.
한국 뮤지컬의 장애인 캐릭터
한국 뮤지컬은 어떨까. 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할란카운티>(2019)의 청각장애인 라일리, 무장애 음악극 <합체>(2022)의 저신장 아버지와 유난히 키가 작은 쌍둥이 형제 합과 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는 <앨리스>(2023)의 나영, 시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 장애를 가진 <헬렌 앤 미>(2023)의 헬렌 켈러,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2024)의 주인공 키키가 있다. 그리고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는 정서적·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아몬드>(2022)의 윤재도 뮤지컬로 다뤄졌다. 국립극장의 <합체> 외에,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공연의 전반적인 환경을 ‘무장애’ 지향으로 구축하는 시도는 아직 민간단체의 작업에서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뮤지컬에서는 아직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로 표현이 가능한 수준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캐릭터로 흡수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아몬드> 재연은 발전적인 비전을 보여준다. 고등학생 윤재는 아몬드처럼 생긴 뇌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도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다. 묻지마 살인으로 할머니가 죽고 엄마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채로 입원하여 느닷없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지만, 침착하고 냉정하다. 친구들은 이런 윤재를 ‘괴물’이라 부른다. 윤재 본인도 자신의 장애를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니 세상과 자신을 굳이 연결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다.
이런 윤재의 무감각한 상태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곤이와 도라다. 유년 시절에 납치되어 소년원에 있다가 부모에게 돌아온 곤이, 그리고 오로지 달리기밖에 모르는 도라와 친구가 되어 윤재는 관계의 깊이를 경험한다. 곤이의 폭력과 욕설, 도라의 외골수 기질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타인에게 진심인 관계 맺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윤재는 이들과 함께 성장하며 ‘감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뮤지컬 <아몬드>는 윤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모두가 함께 읽는다는 설정을 공연의 전체 흐름으로 만들어 원작 소설에서 벗어난다. 엄마의 손길이 가득한 ‘지은이 서점’에서 할머니와 엄마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이 윤재의 책을 함께 읽으며 극을 진행시킨다.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윤재의 삶을 관조하는 인물들의 내레이션이다. 이번 재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내레이션 연출 콘셉트에 담긴 메시지다. 윤재 역할 외의 배우들은 의상 체인지 없이 각자 여러 인물들을 연기하며 계속 무대 위에 머무른다. 윤재를 둘러싼 인물들이 시종일관 윤재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한 소절씩 나눠 읽고 결말에서 책을 덮는 행위는,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윤재를 모두가 지켜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함께 꿈꾼다는 의미를 더한다.

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오후 1시에 <Maybe Happy Ending> 프로덕션은 특별 회차를 만들어 ‘자폐 친화적 공연(Autism Friendly Performance)’을 완료했다. 비영리 공연예술 지원 단체인 TDF(Theatre Development Fund)의 별도 지원 아래 사운드와 조명이 자극을 낮추기 위해 조절되었고 극장 로비에는 전문가가 상주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세심한 고려가 필요한 이러한 기획은 포용적인 마인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앞으로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도 더 흥미진진하고 일상적인 장애인 캐릭터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아몬드>가 인물들에게 윤재의 삶을 나누는 존재로서의 ‘포용성’을 추가한 것은 단순한 연출적 선택이 아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