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목표를 이룬 뒤 찾아오는 허탈감은 운동선수들이 흔히 겪는 현상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거나 메이저대회를 제패한 뒤 동기를 잃고 방황하는 이른바 ‘포스트 어치브먼트 신드롬’이다. 리디아 고(뉴질랜드)는 달랐다. 지난해 파리올림픽에서 여자골프 금메달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명예의 전당’에 역대 최연소(27세)로 입회했다. 곧이어 메이저대회 AIG여자오픈까지 석권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4개 메이저대회 우승)까지 한 대회만 남겨뒀다. 지난 3월 LPGA투어 HSBC여자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통산 23승을 달성하고, 지금도 매 대회 최고의 샷과 코스 공략을 고민한다. 여자골프 ‘살아 있는 전설’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 순간에 머물기보다는 성장을 택한 결과다.
◇최연소 기록 싹쓸이한 ‘골프천재’
지난 23일 서울 이태원에서 만난 리디아 고는 “매 순간을 더 소중히 느끼며 골프를 하고 있다. 우승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알기에 올 시즌 남은 대회에서 한번 더 우승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21일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하나금융그룹챔피언십 출전을 위해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출국 전 의류 후원사 보스골프가 마련한 ‘팬 밋업’ 행사장에서 팬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 팬들 앞에서 경기를 하고, 이렇게 응원을 받는 것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다”며 “어릴 땐 제가 태어난 나라에서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부담이 컸지만 지금은 그저 즐겁고 감사하다”고 말했다.리디아 고는 서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처음 골프채를 잡았고, 여섯 살에 뉴질랜드로 건너갔다. 2012년 호주여자프로골프(ALPGA)투어 NSW오픈에서 14세에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그는 2014년 16세에 프로에 데뷔한 뒤 온갖 최연소 기록을 새로 썼다. 남녀 골퍼를 통틀어 최연소 세계랭킹 1위, 최연소 메이저 우승, 여기에 작년에는 최연소 명예의 전당 회원까지 추가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룬 그의 나이는 이제 28세, 그가 만들어갈 역사가 여전히 진행형인 이유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뒤 리디아 고가 은퇴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투어를 뛰고 있다. 그는 “이번주에 우승해도 다음주면 이븐에서 모두 시작하고, 곧바로 커트 탈락할 수 있는 게 골프”라며 “어린 시절에는 우승 몇 번, 톱10 몇 번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한 번의 우승이 얼마나 값진지 절실히 안다”고 미소지었다.
◇“최고 순간 은퇴도 고민”
올해 초 거둔 우승은 그에게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줬다고 한다. 리디아 고는 “이제는 경기가 잘 안 풀리면 오히려 이런저런 시도를 더 해보며 그 순간에 집중한다”며 “지금 안 풀리더라도 다음에 더 완성도 있는 플레이를 준비한다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투어 12년차 베테랑으로서 LPGA투어의 변화도 체감한다. “지노 티띠꾼(태국), 넬리 코다(미국) 같은 선수들은 장타에 정교함까지 갖췄죠. 그리고 체력 훈련, 샷 훈련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세계 각국 선수들의 기량이 고르게 올라가고 있어요. 우승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매주 다른 챔피언이 나오는 게 놀랍지 않습니다.”
그는 US여자오픈, KPMG여자PGA챔피언십 중 하나만 우승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은퇴’도 고민하고 있다. 리디아 고는 “그랜드슬램 달성이 욕심나면서도 경쟁력이 떨어져서 사라지기보다는 최고의 순간에 은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정확히 반반 정도 공존한다”며 웃었다. “올해는 성적 자체보다 골프선수로서 한번 더 성장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매 대회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주면서 저를 더 이해하고, 제 골프의 깊이를 더하려고 해요.”
명예의 전당 입회 이후 맞은 골프인생 2막, 리디아 고는 공허함 대신 성장을, 숫자 대신 깊이를 택했다. 그가 만들어가는 전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