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 환영!’
2016년 여름, 미국 애틀랜타공항에 내렸을 때 로비에 붙은 현수막을 보고 놀랐다. 자동차 1등 나라에서 저런 현수막을 보게 될 줄이야. 미국 임원이 몰래 언질을 줬다. 기아 연봉이 조지아주에서 가장 높아서 지원자가 줄을 선다고. 인도 남부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평균 월 급여 1200달러에 고학력자가 몰려든다.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우시의 SK하이닉스, 인도의 포스코도 마찬가지다. 청년 인재들에게 인기가 높다.
제조업만 진출하는 게 아니다. 농업도 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 지역에서 한국인 특유의 투지를 불사르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이 개척한 팜 농장이다.
서울 면적의 60% 팜 농장

파푸아는 아프리카만큼 오지다. 인도네시아령 파푸아의 면적은 한반도의 네 배인데, 인구는 고작 560만 명에 불과하다. 잡목이 빽빽이 들어찬 숲에 흩어져 산다. 파푸아 한가운데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팜 농장 ‘PT.BIA’가 있다. 불모의 숲을 가꾼 지 올해로 15년째. 엉클어진 잡목 숲이 어엿한 과수림으로 바뀌었다. 천지개벽이란 말이 어울릴까.
서울에서 파푸아 주도인 자야푸라까지 비행기로 꼬박 12시간, 다시 남부 해안 도시 메라우케까지 1시간 비행. 거기까지는 문명적이었다. 간혹 허물어진 험난한 길을 지프차로 5시간 달려 팜 농장의 정문에 도착했고, 본부까지는 한 시간을 더 달려야 했다. 농장 크기는 3만4000헥타르(㏊), 서울 면적의 60%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에 열병식 하듯 350만 그루의 팜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다산성 숲은 장관이었다. 전망대에 올라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광화문에서 잠실이 보일 리 만무하다.
이제는 먹고살 만한데 왜 한국인은 오지를 마다하지 않는가. 배고픔을 아는 민족이기에 그렇다. 가는 길에서 마주친 선주민들은 궁핍했고 헐벗은 모습이었다. 정부에서 경작지를 줘도 천렵과 사냥에 몰두한다. 인류학자라면 그게 자연스러운 환경이겠거니 하겠지만, 배고픔을 아는 민족은 그들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 한다.
우리에겐 시급한 식량 산업을 일궈 보겠다는 꿈도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일찍이 우크라이나 흑해 연안 곡물터미널을 매입해 식량 안보에 깃발을 올렸다. 곡물 중개사업을 확장해 유사시 한국 식량 조달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포부다. 제조업이 그렇듯, 한국인은 세계 어디든 간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옛 모체인 대우인터내셔널이 배양한 ‘세계경영’과 포스코 특유의 ‘우향우 정신’을 결합해 오지와 험지를 마다하지 않는 진격의 탐사대다.
식량 안보와 농업
팜 농장 PT.BIA 총책임자 공병선 관장. 농장 개척에 청춘을 바친 그는 서울대 농대 출신이다. 전공을 살렸다는 필자의 덕담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식량 안보의 전사죠!” 맞다. 한국의 농지 총면적은 160만㏊인데 매년 급격히 줄어든다. 게다가 농민의 고령화가 ‘농촌 공동화’를 초래한다. 고령 농민을 대체한 인력은 동남아시아 출신 청년이다. 현재 한국의 농산물 자급률은 고작 45%. 수입액은 매년 늘어간다. 사정이 그러니, 인도네시아 팜 농장은 외국 농업 경영 경험의 축적이자 국가적 미래사업이다.
신비의 나무, 팜
팜 열매는 신비 그 자체였다. 코코넛과 야자는 익숙했지만, 팜은 과일인지 씨앗 뭉치인지 구별이 안 됐다. 얌전하게 뻗은 줄기 사이에 송아지 머리만 한 열매 덩어리가 다소곳이 얹혀 있는데, 도토리 같은 과실을 2000여 개나 품는다. 과육을 짜면 팜오일을 얻고, 안에 든 씨앗을 압착하면 팜커넬오일이 나온다. 전자는 식용과 바이오 연료, 후자는 비누·화장품·세제의 천연 원료다.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팜유는 우리가 즐겨 먹는 과자의 필수 재료로 쓰이는 한편 항공유, 바이오 플라스틱, 고체바이오연료 등 탄소를 줄이는 친환경 원료로 각광받고 있다.팜나무는 30년 생장 기간에 이런 열매를 매년 10개 이상 맺는다고 하니 천상의 친구다. PT.BIA는 연 20만t 이상의 팜오일 생산 공장을 가동 중인데, 수도 이전 예정지인 누산다라 인근 항구에도 팜오일 정제공장을 짓고 있어 ‘재배-착유-정제-물류’의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
팜의 주 생산국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 두 나라가 전 세계 생산량의 84%를 차지한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여럿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특히 PT.BIA는 인권 중시 경영과 생산성 측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요즘 말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다. 연평균 수익이 1000억원을 넘어선 PT.BIA는 이제 황금의 숲이자 작업인들이 희망찬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우애 공동체’가 됐다.
‘우애 공동체’ K농장
플랜테이션은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대규모 농장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브라질의 커피 농장은 말 그대로 노동 착취의 대명사였다. 필자는 혹시 PT.BIA에도 그런 모습이 보일지 조바심이 일었다. 세 구역으로 나뉜 팜 농장에는 여러 인종의 작업인들이 거주하는 마을과 자녀를 위한 학교, 병원, 스포츠 시설이 각각 조성돼 있었다.학교는 일종의 부족박람회 같았는데, 아이들의 즐겁고 행복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이 성장해 상급 학교에 진학할 것에 대비해 공 관장은 인근 도시 메라우케에 기숙사 신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병원은 4000여 명에 달하는 작업인과 가족들 건강을 책임진다. 연평균 3만5000회에 달하는 진료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자바 정부에서 파견된 간호사와 약사가 각종 약이 비치된 약장을 보물상자처럼 정돈했다. 마치 한국 농촌에서 목격하는 마을공동체처럼, 부족이 달라도 상부상조하는 우애 공동체가 거기 있었다. 거주 시설은 무척 깔끔해 보였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선주민 한 사람이 집을 나섰는데 도로변에서 목격한 것과는 사뭇 다른 세련된 차림이었다. 연봉 5000달러에 걸맞은 차림새였다.
문명 세계로 진입하는 원주민
선주민들이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작업인 중 선주민 비율은 10% 남짓. 인력이 태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의 존재는 소중하다. 건강하고 일을 잘한다. 그런데 규율 개념을 주입하는 것이 문제다. 공 관장은 뉴기니 외 인근 섬에서 이주한 선주민들을 교육해 현장에 투입하면 하루도 안 돼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사례가 빈발했다고 털어놨다.성공적으로 정착한 선주민들은 월급을 저축해 자녀들을 교육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농장 인근 선주민들의 경제 자립을 위해 경작지를 할애하는 플라즈마 시책에 적극 동참한다. 식민통치를 받은 민족의 한(恨)과 인류학적 우애를 그렇게라도 풀고 싶은 것이다.
K농장, 그 마음의 습관
PT.BIA 농장에 파견된 주재원은 8명, 현지에서 고용한 한국인 전문가 16명까지 모두 24명이 농장을 관리한다. 관리방식은 민주주의 그 자체다. 작업인들의 민원을 수리하고, 불평과 불만 요인을 파악해 해소한다. 주재원들의 평균 연령은 45세 정도다. 이들은 민주적 관행과 관습 속에서 자랐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공정심을 배양한 세대다.2억8000만 인도네시아인은 과거 군부 정치에 시달렸고, 특히 1965년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잊지 못한다. 군부 정치를 똑같이 겪은 한국 주재원들이 실천하는 인간애적 관리방식과 인권 중시 마인드를 4000여 작업인이 감지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동력인 ‘마음의 습관’에 해당한다. 인도네시아의 K농장은 파푸아의 빈곤과 궁핍을 풍요로 바꾸는 전진기지이고, 이웃 국가이자 곧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할 동남아시아의 중심 국가에 민주주의를 식재하는 농장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귀국길, PT.BIA 주재원들과 악수를 나누는 손길에서 힘이 느껴졌다.
■ 송호근 교수 약력
△1956년 경북 영주 출생
△1979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1989년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1989~1994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1994~2018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18년 포스텍 석좌교수
△2022년~ 한림대 도헌학술원장 겸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