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1위로 키워놓고 전격 매각
2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DL케미칼은 지분 100%를 보유한 카리플렉스를 매각하기 위해 글로벌 IB를 대상으로 주관사 선정 작업에 나섰다. 희망 매각가는 1조원 후반에서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DL케미칼의 카리플렉스 인수는 국내 업체의 해외 기업 인수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2020년 글로벌 화학사 크레이튼의 IRL사업부를 약 6200억원에 인수한 이후 2022년 매출 3024억원, 영업이익 611억원을 기록하며 호황을 누렸다. 인수 직후 코로나19 여파로 주력 제품인 수술용 장갑 등의 수요가 대거 늘면서 수혜를 봤다. 지난해에도 매출 2397억원, 영업이익 474억원을 기록하며 석유화학 업황 부진 속에서도 유일하게 안정적인 실적을 냈다.
DL케미칼은 2022년 5000억원을 추가 투자해 싱가포르에 축구장 8.5개 크기인 6만1000㎡ 규모 세계 최대 생산 설비를 증설하면서 카리플렉스를 글로벌 1위 회사로 키웠다. 올해 말부터 생산이 본격화하면 라텍스 생산 능력이 50% 이상 늘고 이익률도 10%포인트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DL케미칼이 카리플렉스 매각을 전격 결정한 것은 주력 사업을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더 내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업계 관계자는 “DL케미칼은 상대적으로 범용 제품 비중이 적어 버틸 수 있지만 다른 석유화학사들은 불황의 직격타를 맞다 보니 그룹에선 알짜 자산이 싸게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며 “카리플렉스 매각으로 현금을 확보해 추가 인수합병(M&A)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IRL사업은 국내외 화학사들이 눈여겨보는 고부가 스페셜티 부문인 만큼 다수 후보가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용 제품에 쓰이는 IRL은 인증 기준 등이 깐깐해 신규 사업자에 진입 장벽이 큰 영역으로 꼽힌다. 국내외 화학기업과 사모펀드(PEF) 등이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크레이튼 정상화 위한 현금 필요”
이번 매각이 성사되면 잇단 M&A로 가중된 DL케미칼의 재무 부담이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DL케미칼은 2022년 글로벌 화학사 크레이튼을 인수하는 빅딜을 단행했다. 크레이튼 지분 100% 가격인 16억달러(약 1조9000억원)에 더해 1조원에 달하는 크레이튼의 부채도 승계한 3조원 규모 거래였다. 이 과정에서 2021년 말 78%이던 DL케미칼 부채비율은 2022년 말 239.6%까지 급증했다. 자회사인 여천NCC의 대규모 손실까지 겹치며 올해 1분기 말 부채비율은 350%로 치솟았다.그룹의 사활을 건 빅딜이었지만 크레이튼 실적은 주춤했다. 인수 직후 연간 손실을 기록하다가 올 상반기 45억원의 이익을 거두는 데 그쳤다. 인수 직후 우크라이나전쟁이 발발해 크레이튼이 강점을 보이는 유럽에서 수요가 급감한 점이 악영향을 미쳤다. 크레이튼은 아스팔트, 자동차 내장재, 5세대(5G) 통신 케이블 등에 두루 활용되는 특수 소재인 스티렌블로코폴리머(SBC) 분야에서 유럽과 미국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다. 업계에선 전쟁 종식 후 재건 과정에서 미뤄진 기반시설 투자가 시작되면 SBC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DL 입장에선 크레이튼의 정상화 시기까지 버틸 현금이 필요한 상황인 만큼 카리플렉스 매각도 이 과정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
